광개토태왕비가 몸살을 앓고 있다. 일본은 ‘임나일본본부설’(일본 야마토정권이 4세기 후반 한반도 남부 지역에 진출, 가야에 일본부라는 통치기관을 두고 지배했다는 학설)의 근거로 광개토태왕비 비문을 들고 나섰다. 최근 중국에서 출간되는 광개토태왕비 탁본은 표지에 버젓이 '진호태왕비'(晉好太王碑)라고 쓰여있다. 광개토태왕을 중국 동진(東晉) 시대 진나라 왕으로 치부하는 셈이다. 지난해에는 중국 지린성(吉林省) 고구려문화유적 안내판에 광개토태왕비를 ‘중화민족 비석 예술의 진품’으로 소개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우리 정부가 시정을 요구하기도 했다.
김병기 전북대학교 중어중문과 교수는 처음으로 광개토태왕비 비문 글씨체에 주목, 논란이 되는 391년 신묘년 기록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은 인물이다.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 이라고 새겨진 부분이 여기에 해당한다. 김 교수 주장의 요지는 일본이 원석을 만져 ‘入貢于’(입공우) 세 글자를 '渡海破’(도해파)로 변조했다는 것이다.
세 글자를 바꾸면 일본 측 주장이 완전히 뒤집힌다. 일본은 지금까지 ‘신라는 예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어서 줄곧 조공해 왔다. 그런데 왜(일본)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와 신라를 깨부수어 (일본의)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해왔다. 김 교수는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다. 그래서 줄곧 조공을 바쳤다. 그런데 일본이 신묘년이래로 백제와 □□와 신라에게 조공을 들이기 시작했으므로 (고구려는 일본을) 신민으로 삼았다’는 뜻으로 본다. 광개토태왕의 업적을 치하하려고 남긴 비석의 취지와도 일맥상통하는 해석이다.
김 교수는 10일 쿠키뉴스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역사학계가 광개토태왕비를 연구하는 자세에 근본적 전환이 필요하다”며 “실증주의 사학에 너무 매몰돼 있는 것은 아닌가 우려된다”고 말했다.
다음은 김 교수와의 일문일답.
-광개토태왕비 글씨체의 어떤 점에 반했나.
지난 1982년 대만에 유학 중 처음으로 광개토태왕비 탁본집을 접했다. 그 이전부터 서예계에서 광개토태왕비 글씨체가 참 아름답다, 멋있다는 이야기를 익히 들어왔다. 탁본집을 보면서 임서(臨書·옛 필적을 옆에 두고 보면서 따라 씀) 하다가 글씨에 정말 감동했다.
광개토태왕비 글씨체는 같은 시기 중국에서 유행한 글씨와 비교해보면 차이가 크게 난다. 중국 글씨체는 소위 말해 ’삐침획’으로 부린 기교, 장식성이 특징이다. 그러나 광개토태왕비 글씨에는 전혀 그런 게 없다. 꾸밈없는 질박함, 순수함이 가장 큰 매력이다. 조선의 토종 소나무인 홍송(紅松)의 힘차게 뻗은 불그레한 가지를 툭 잘라다가 엮어 놓은 것 같은 웅장함이 있다. 지난 1992년 중국과 수교가 되면서 한국에서도 광개토태왕비 탁본을 접할 수 있게 됐는데 당시 한국 서예계에 하나의 유행으로 번질 정도였다. 다들 ‘우리 고구려 기상이 담긴 글씨다’라고 감탄했던 것이 기억난다.
삐침이나 장식 없이 반듯한 필획으로 쓴 글씨는 1000년 뒤 세종대왕의 ‘용비어천가’를 새긴 목판본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우리 민족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글씨체라고 할 수 있다.
-글씨가 조작됐다는 주장의 근거는
먼저 ‘도해파’ 세 글자의 글씨체가 다른 글씨들과 확연히 구분된다. 정사각형 예서체로 삐침획 없이 담백하게 쓰인 다른 글자와는 달리 ‘도해파’는 皮가 石보다 아래쪽에 있거나, 획이 굽어 있고, 줄을 벗어나 한쪽으로 치우치는 모습이 나타난다. 또 조작된 글자에 19세기 일본에서 유행하던 ‘명조체’의 특성이 드러나는 것도 비문을 변조한 자가 무의식적으로 평소 자신의 필체를 남긴 흔적이라고 판단했다.
무엇보다도 속민(屬民)과 식민(臣民)의 차이가 핵심이다. 이전까지는 ‘속민’과 ‘신민’이 큰 차이가 없을 거라고 봤다. 그런데 속민과 신민은 완전히 다른 별개의 개념이다. 속민은 같은 혈연 관계에 있으면서 조공을 바치고 예를 갖출 때 그 국민을 가리키는 단어다.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를 같은 민족이면서 예로부터 조공을 해온 나라이기 때문에 속민이라는 전용 명사로 나타냈다. 중국 역사책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는 고구려인만의 어법이다. 반면 신민은 아무런 혈연 관계가 없이 신하의 예를 갖추는 국가의 백성을 일컫는다.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혈족 관계로 보나 조공 관계로 보나 복속의 정도가 강한 속민인 백제나 신라를 복속의 정도가 낮은 신민으로 표현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광개토태왕비에서 유일하게 신묘년 기사에만 등장하는 신민은 왜를 가리키는 말일 수밖에 없다.
-이 주장을 제기한 게 지난 2004년이다. 그 이후 광개토태왕비 왜곡 논의가 진전된 것이 있나
지금까지 많은 연구가 있었지만 ‘조작됐다’와 ‘조작되지 않았다’로 관점으로 나뉘어 서로 싸움만 했다. 다들 탁본을 갖다 놓고 글자를 보면서 ‘내가 보기에는 이런 글자인 것 같다’는 식이지 주장에 어떤 근거를 대면서 얘기가 나온 것은 아직 없는 것으로 안다.
지난 2004년 중국사회과학원 연구원이라는 사람이 자신이 현재 알려진 가장 오래된 ‘사코 가게노부(酒勾景信) 탁본’ (이하 사코 탁본)보다 앞선 탁본을 발견했다며 난리가 났었다. 우리나라에서 학술대회가 열려 그 자리에 갔었는데 이 장면을 비디오로 찍어서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사람이 가져온 탁본이라는 게 서예 학자 관점에서 말도 안 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탁본의 출처를 명확히 밝히라고 요구했더니 그 연구원이 “골동품점에 나와 있는걸 샀다”고 하더라. 한 나라의 운명을 가를 수도 있는 학술대회에 진위조차 가려지지 않은 탁본을 들고나오다니, 기가 막혔다.
-주장이 학계에서 큰 호응을 얻지 못한 이유는 뭐라고 보나
우리나라 역사 연구하는 사람들의 고질병이라고 생각하는데, 역사는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자연과학 등 다른 분야 학문을 동원해 통합적인 시선에서 함께 연구하고 논의할 필요가 있다. 탁본은 금석학에 포함된다. 금석학의 학문 코드 자체가 서예이기 때문에 광개토태왕비에 대한 서예학적 연구가 필요하다. 그런데 일각에서 내가 하는 얘기에 ‘왜 서예 하는 사람이 역사에 끼어드냐’ ‘독창적 의견이라며 자아 도취한다’는 반응을 보이면 안타깝다.
또 일부 역사학자들이 실증사학이라는 개념에 너무 매몰돼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역사는 증거를 가지고 말해야 한다’는 개념이 중요하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실증사학을 강조하는 이들은 대개 일본 역사학계 쪽이다. 왜냐. 이미 일본에서 우리나라의 역사 유물들을 약탈하고 가져갔기 때문이다. 특히 고대 사료의 많은 부분을 인멸시켜놓고 증거를 가져오라 하면 참 난감하다. 증거가 어디 있나. 다 변조하고 왜곡시켜놨는데.
-중국 역시 동북공정 일환으로 광개토태왕비에 대한 사학자들의 접근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왜곡 논의가 진척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고 보나
먼저 한국 학자들이 공동 연구단을 만들어 광개토태왕비를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한국 정부와 중국 정부 간에 협의가 선행돼야 한다. 한국인 학자들이 비석을 둘러싼 방탄유리를 걷어내고 지지대를 세워놓고 올라가 수평 높이로 실제 비문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중국은 이를 절대 허가하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또는 일본에게 사코 탁본을 공개하라고 당당히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광복 이후 사코 탁본의 원본은 딱 한 번 공개됐다. 많은 학자들이 원본을 같이 보고 논의할 필요가 있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탁본의 앞 뒷면을 면밀하게 본다면 조작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우리 학계가 광개토태왕비를 연구하는 자세를 근본적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조작 논란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런데 학계는 이분법적으로 나뉘어서 싸우기 바쁘다. ‘변조되지 않았다’는 측은 “이미 30년 전에 끝난 얘기를 고리타분하게 들고나온다”고 말한다. 그런데 ‘변조됐다’는 측은 국수주의에 빠져 ‘일본은 나쁘다’는 감정을 실어 무턱대고 주장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 역사를 바로 찾는 일이다. ‘내가 잘났다’ ‘네가 잘났다’ 싸우는 것은 중요치 않다. 역사학자든 서예학자든 다 같이 모여 앉아 문장을 처음부터 차근차근 다시 보고 얘기를 해봤으면 좋겠다. 내 주장을 덮을 정도로 좋은 얘기가 나오면 언제든 물러설 준비가 돼 있다.
정진용 기자 jjy4791@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