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규의 영화토크] 이창동 감독의 버닝, 우리는 그레이트 헝거인가 리틀 헝거인가

[이호규의 영화토크] 이창동 감독의 버닝, 우리는 그레이트 헝거인가 리틀 헝거인가

기사승인 2018-06-04 09:00:50

영화 ‘시’ 이후 8년 만에 복귀한 이창동 감독은 기존 작품과는 달리 영화 ‘버닝’을 통해 무엇이 정답인지 모르고 살아가는 이 시대 젊은이들의 방황과 분노, 엇갈림에 대해 초점을 맞추었다.

‘초록물고기(1997)’, ‘박하사탕(2000)’, ‘오아시스(2002)’, ‘밀양(2007) 등 이창동 감독의 대표작들은 주로 캐릭터 간의 묘연한 관계, 밑바닥에 처한 주인공의 상황을 전면에 내세우며 사회를 비판하고 인물들의 비참하면서 강렬한 이야기를 그려냈다.

‘버닝(2018)’ 역시 예상치 못한 만남, 엇갈림, 무력감, 분노를 나열하며 미스테리하면서 힘있는 스토리텔링을 전개했다.

종수(유아인)는 파주에 홀로 산다. 군 복무도 마쳤지만 소설가가 되겠다며 유통회사 알바생으로 인생을 살고 있다.

나래이터 모델로 길거리에서 춤을 추는 해미(전종서)는 카드빚에 시달리며 경제적으로 힘들지만, 아프리카 여행을 간다며 종수에게 원룸에 수시로 들러 고양이를 돌봐 달라고 부탁한다.

해미의 귀국 전화를 받고 공항에 간 종수는 아프리카에서 만났다는 오빠 벤(스티븐 연)을 소개받는다. 벤은 서울 반포의 고급 빌라에 살고 포르셰를 모는 전형적인 ‘금수저’이다.

영화는 미스테리한 벤의 등장으로 힘을 얻기 시작한다. 직업, 나이, 사상 등 어느 하나 공개되지 않고 베일에 가려진 그의 행보는 단순한 듯 전혀 단순하지 않게 3명 인물들 간의 서사를 지탱하고 몽롱하고 아름다운 미장센과 연계되어 알 수 없는 이야기 속으로 관객들을 끌어낸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들은 모두 따뜻한 인간애를 찾기 힘들다. 밑바닥 생활, 비극, 인물들간의 풀지 못한 갈등이 뒤범벅되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숨겨진 욕망과 비밀을 숨겨둔다.

버닝에서도 중간에 아무 메시지 없이 갑자기 사라진 해미의 실종은 결국 종수와 벤 사이의 갈등을 증폭시키고, 서로간의 파국으로 치닫는 빌미를 제공한다.

종수의 끈질긴 의심은 계속되지만, 영화는 끝내 왜 해미가 사라졌는지에 대한 해답을 주지 않고 관객들이 상상하게끔 유도한다.

영화 버닝은 대사 속 해미가 내뱉은 메타포와도 같다. ‘A는 B와 같다’는 식의 비유가 아닌, 오히려 ‘~같다’는 비교를 통해 직접적으로 명시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대중적이지 않다. 분명한 해답과 결과물을 희망하는 관객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렵고 문득 다가서기 힘들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관객과의 소통이 적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창동 감독만의 세련된 작가주의 세계이다.
 
영화 속 해미의 작은 방 사이로 비치는 따스한 햇빛이 들어섰다 갑자기 사라지는 미장센은 곧 닥칠 그들의 불운한 관계와 운명을 이야기하고 있다.

숨이 막힐 것만 같은 2평 남짓의 해미의 방과 벤의 60평대 반포 빌라, 종수가 사는 파주의 허름한 고향집은 그들이 처하고 있는 정체성과 상대성을 리얼하게 보여준다.

전체적으로 버닝은 다양한 선택을 통해 대사에도 등장한 리틀 헝거(little hunger)와 ‘그레이트 헝거(great hunger)'’를 묘사한다. 영화 속에서 ‘리틀 헝거’는 물질적 빈곤과 배고픔을, ‘그레이트 헝거’는 삶의 의미 상실이 유발하는 인생의 참된 의미에 대한 갈망을 말한다.

청년취업난에 시달리고 카드빚에 시달리며, 혹독한 경제난에 허덕이는 젊은이들은 인생을 어떻게 행복하게 살아야하는지, 속된 말로 참된 인생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있다.

3명의 등장인물 중 해미는 분명 영혼이 배고픈 ‘그레이트 헝거’이다. 벤은 경제난과는 거리가 먼 강남 금수저이지만, 그 역시 그레이트 헝거로 그려졌다.

종수는 리틀 헝거이지만, 해미와 벤이라는 그레이트 헝거 앞에서 쉽게 뒤섞이지 못하고 경계하는 아웃사이더 캐릭러로 갈등을 나타냈다.

유아인은 버닝에서 100% 감정을 내뱉지 못하고 억누르고 삼켜져 있는 듯한, 마치 소주1병을 마신 취한 남자처럼 흐린 정신에 어눌한 화법, 소를 닮은 슬픈 눈빛으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버닝은 유아인 영화 중 가장 감정을 절제하고 조절한 영화이다. 마치 정신줄을 놓은 듯한 표정과 한 템포 끊기는 듯한 대사처리는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암울하고 어두운 종수의 면모를 보여준다.

암울하고 해답을 찾지 못하는 종수, 자유의 영혼 해미, 미스테리한 벤의 캐릭터는 서로를 지탱하며 관계를 2시간30동안 지루함 없이 이어간다. 영화 속에서 그들 중 한명이라도 없다면 스토리는 끊길 수밖에 없다.

해미는 삶이라는 키워드에 혼란스럽고 불안정한 젊은 여성을 대표한다. 벤 역시 개방적이면서 적극적인 금수저의 캐릭터를 제대로 표현했다. 종수는 소설가라는 막연한 직업군을 희망하며 생활고에 시달리는 우울하고 어두운 젊은층의 민낯을 드러냈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수확은 세 인물이 함께 호흡하면서 빛과 소리 같은 드라마틱한 앙상블을 창조한 것이다. 마임을 통해 해미는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며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메타포를 통해 팬터시를 꿈꿨다.

이들이 꿈꾸는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창동 감독은 세 인물의 갈등 속에서 진정한 행복이나 젊은이들의 삶의 방식을 묻기보다는 금수저든 흙수저든 계급은 다르지만, 그저 우리가 사는 세상과 현실이 젊은이들의 눈 속에 어떠한 모습일까라고 관객들에게 질문하고 있는 듯하다.
이호규 남예종예술실용전문학교 연기예술학과 교수·영화평론가

이영수 기자
juny@kukinews.com
이영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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