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빈 감독은 본인의 말을 빌면 ‘시네마 키드’는 아니었다. ‘용서받지 못한 자’ ‘범죄와의 전쟁’ ‘군도’를 거쳐 ‘공작’까지. 훌륭한 창작자이자 이야기꾼이지만 처음 시작은 단순했다. 최근 ‘공작’ 개봉을 앞두고 서울 팔판길의 한 카페에서 만난 윤종빈 감독은 “어릴 때는 사실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윤종빈 감독의 십대 시절, 소년들을 지배한 것은 황비홍, 이소룡 등의 액션 영화다. 그러나 윤종빈 감독은 그 영화들이 “너무 가짜 같았다”고 말했다. 공감하고 싶고, 사실적인 영화를 보고 싶었지만 트렌드가 그렇지 않았다. 수능을 봤고, 점수는 낮았지만 재수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선택했다. 선택 동기는 단순했다. 김희선, 고소영 등의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이 동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진학해 영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접했다. 사람에 대한 사실적인 이야기를 다룬 영화는 윤 감독에게 충격적이었고, 동기를 부여했다. “영화란 매체의 다른 가능성을 본 것 같았어요. 그때까지 제게 영화는 거짓말, 상상 같은 거였거든요.” 명작 영화들을 찾아보며 다양한 매력을 발견했다. 물론 그게 극적인 계기는 아니었다. 가랑비에 옷깃 젖듯이 다양한 이유들이 윤 감독을 영화감독의 길로 떠밀었다. 군대를 다녀와 글도 써 보고, 트레이닝을 시작했다. 군대 이야기가 해 보고 싶어 ‘용서받지 못한 자’를 썼다. 하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해서 모두 그의 영화가 된 건 아니다.
“‘공작’은 실화 자체가 주는 재미가 있다고 생각해서 썼어요. 하고 싶은 이야기나 목적이 있어서 한 건 아니에요. 주제나 소재는 따로따로 분리해서 볼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스스로의 재미가 첫 번째고, 두 번째는 제가 쓰고싶은가를 따져요. 간혹 만들고 싶은 장면을 정해놓고 글을 쓰는 감독들도 있지만 저는 그렇진 않아요. 처음부터 큰 틀을 만들고 시놉시스를 쓰죠.”
‘공작’도 한 호흡에 완성된 이야기였다. ‘흑금성’ 박채서 씨의 이야기.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벌어진 북풍 공작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 윤종빈 감독은 그 시대에 대한 자료조사를 시작했다. 자신이 1997년에 지금도 살고 있는 사람처럼 되기 위해 그 시대를 탐독했고, ‘됐다’ 싶을 때 3일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글만 썼다.
“’공작’은 오프닝과 엔딩을 정해놓고 썼어요. 제가 이야기를 열고 닫을 때의 방식은 대부분 그렇죠. 이효리 씨의 CF를 알고 있는 분들은 많지만, 그 뒷이야기를 아는 분들은 많지 않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CF를 성사시키려 했던 두 남자의 이야기라고 정해 놓고 이야기를 시작했어요.”
‘공작’의 시나리오가 나왔을 때는 2015년. 정치 상황이 복잡한 때였다. 주변 사람들이 ‘만들 수 있을까’하고 윤 감독보다 훨씬 우려했다. 그러나 윤 감독은 “나는 무딘 사람이라 제작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는 헌법으로 보장돼 있는데 왜 이걸 못 하겠느냐’라고 그 무렵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대답했단다. 영화 한 편이 뭐라고, 높은 분들은 바쁘시니까 이런 건 신경 안 쓰실 거라고 웃으며 대답했다. 그 사람들이 생각보다 바쁜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막상 윤종빈 감독이 힘들었던 건 장르적 접근이었다. 배우들은 너무 힘들다고 윤 감독에게 고통을 호소했다.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너무 많아서다. 황정민이 맡은 흑금성은 티를 내지 말아야 했고, 이성민이 맡은 리명운은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윤 감독의 말을 빌면 ‘밧줄로 꽁꽁 묶어놓고 연기하라고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될 때까지 해보자고 다독이며 찍었어요. 어려운 시도를 했고, 만들고 나니 해냈다는 성취감과 프라이드가 공존하죠. 저 뿐만 아니라 참여한 배우와 스태프들 모두가 프라이드를 갖게 된 영화예요. 관객들이 꼭 좀 알아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작품의 훌륭함이나 숭고함 같은 게 아니라, ‘이런 일이 있었구나’ '연기가 훌륭하구나’ 하는 거요.”
이은지 기자 onbg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