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청 원장의 무비톡] 용기내, 손 내밀어 봐요

[정동청 원장의 무비톡] 용기내, 손 내밀어 봐요

기사승인 2018-09-08 00:25:00

오늘의 영화는 ‘인 디 에어(Up in the Air)’입니다. 조지 클루니가 분한 주인공 라이언 빙햄은 고용주를 대신해 해고를 통보하는 사람입니다. 직원에게 나가라고 이야기하는 건 냉혈한이 아니고선 쉽지 않은 일이죠. 영화에선 이런 고용주들을 돕는 업체가 등장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진 주인공은 하루가 멀다 하고 출장을 다닙니다.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었죠.

‘어떻게 저런 일을 업으로 삼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비인간적인 직업이지만, 주인공은 나름의 직업윤리와 철학을 갖고 있었습니다. 흥분한 해고자 앞에서 그는 절대 동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해고가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 될 수 있다고 격려하죠. 그의 말은 묘한 설득력이 있는데, 이건 상대에 대한 이해가 있기 때문에 가능했죠. 

그는 자신의 역할이 절망에 처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찾을 수 있을 때까지 버티고 견딜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자칫 난장판이 될 수 있는 일련의 과정을 세련되고  우아하게 처리하는 자신에게 그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만큼 고용안정성이 보장되지 않은 미국이라 그런지 라이언 빙햄은 쉬는 날도 없이 바쁘게 지냅니다. 미국 전역에서 들어오는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주인공은 매일 비행기를 타고 다닙니다. 그는 공항을 집이라고 생각하고, 기계화된 친절에 편안함을 느낍니다. 공항에서 탑승 수속을 밟을 때에도 그는 가방을 검색대에 올리고 노트북을 꺼내는 행동을 매번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익숙하게 반복합니다. 일 때문에 항상 바쁘고 바쁜 일정을 맞추기 위해 기계처럼 움직이는 것을 그는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죠. 

주인공은 해고자를 상대할 때의 경험을 살려 동기부여 강연자로도 활동합니다. 강의의 주제는 자신의 삶을 항상 가볍게 하고 다니라는 것이었죠. 옷, 가전제품, 가구, 자동차, 집 등의 소유물은 인생을 무겁고 힘들게 할 뿐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청중에게 가방 안에 이런 짐들을 모두 집어넣은 다음 태워버릴 것을 요구합니다. 

그는 물질적인 소유물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철저한 무소유의 삶을 강조했습니다. 실제로도 그는 이성과의 진지한 관계를 만들지 않았고, 심지어 누나와 여동생에게 오는 연락조차  귀찮아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공은 우연히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나탈리를 만납니다. 그녀도 항상 일 때문에 바쁘고 관계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했죠. 삶에 관심이 없거나 관계를 무서워하기 때문이 아니라, 인생을 잘 이해하기 때문에 오히려 인생에서 초연해진 듯 한 모습입니다. 

부담 없이 시작한 관계였지만 주인공은 자신과 비슷한 그녀의 모습에 편안함을 느끼고, 그녀가 자신의 삶 속에 들어오길 바랍니다. 계속 짐을 버리라던 사람이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큰 짐이 될 수도 있는 ‘관계’를 갈망하기 시작한 거죠. 평생을 공중에서 부유하듯 살던 사람이 자신이 착륙할 기착점을 과연 찾을 수 있을까요?

영화의 ‘해고전문가’는 실제론 존재하지 않는 직업이라고 합니다. 주인공이 해고전문가로 등장하는 설정은 관계를 극단적으로 피하는 주인공의 심리적인 특성을 드러내는 장치로 보입니다. 그가 관계에 연연하지 않는 쿨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상처받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관계 형성을 피해온 것이죠. 

이런 특성이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사람들을 정신과적으로는 ‘회피성 성격장애(avoidant personality disorder)’라고 부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존감이 낮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지나치게 민감해하고, 부정적인 평가를 듣게 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아예 단절시켜 버립니다. 영화 속 주인공은 사회적 상황을 판단하고 대처하는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성격장애를 진단할 만큼 부정적인 측면들이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는 대인관계에 대한 두려움이 뿌리박혀 있었습니다. 

진료실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관계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관계에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많습니다. 자신감이 없어서, 가까운 사람이 자신을 비난하는 게 두려워서, 의지하던 사람이 떠나면 힘들까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현대인 대부분은 이런 마음을 어느 정도 갖고 살아갈 겁니다. 직장을 구하고 자기 집과 차를 갖고 안정적인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서적으로는 다른 사람과 쉽게 유대감을 형성하지 못하고 유목민처럼 살고 있는 건 아닐까요?

회자정리, 이자필반이라고 했던가요? 사랑하는 사람을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떠나보내야 하는 것이 사람의 숙명입니다. 이별의 아픔이 두려워 만남을 포기하는 어리석은 종은 인간밖에 없을 겁니다. 진화 과정을 통해 대뇌가 발달하고 생각이 너무 많아진 부작용인지도 모릅니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용기를 내어 부딪치는 것밖에 없습니다. 

자전거를 처음 배울 때나 수영을 처음 배울 때, 처음에는 두려움이 우리를 지배하지만 막상 용기를 내서 시작하면 우리의 두려움이 필요 이상으로 지나쳤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라이언 빙햄은 용기를 내어 관계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의 새로운 시도는 어떤 결말을 맺을까요? 어쩌면 용기를 낸 대가로 자신이 평생 피하려고 노력했던 아픔을 경험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지금까지 그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좌절과 동시에 용기를 주고 격려했던 것처럼, 이번엔 스스로를 위로하고 달래줘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의 용기가 슬픈 결말로 끝나도 그건 새로운 관계를 위한 시작일 수 있습니다. 조심스런 삶은 상실의 경험을 피하게 하겠지만, 용기 없는 삶을 통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서울청정신건강의학과 정동청 원장 eastblue0710@gmail.com

eastblue071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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