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사법부의 사법농단 의혹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 첫 의혹 제기 이후 대통령과 대법원장, 검찰총장이 모두 바뀌었지만 논란은 여전하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등 사법농단의 핵심 인물들은 검찰에 출석해 혐의를 부인했다.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남은 상황이다. 사법농단의 실타래는 어디서부터 꼬였을까. 그 시작부터 현재까지의 상황을 짚어본다.
▲“사법부 블랙리스트 있다”…사직서 한 장에 ‘사법농단’ 수면 위로
사법농단 의혹은 이탄희 수원지법 안양지원 판사의 사직서를 통해 수면 위로 떠 올랐다. 이 판사는 지난해 2월사법부 내 ‘요직’으로 꼽히는 법원행정처 심의관으로 발령됐다. 그러나 이 판사는 일주일 만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 판사에게는 안양지원 재판부로 복귀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 판사의 사직서 제출 경위를 두고 의문이 제기됐다. 일각에서는 법원행정처가 사법부 내 학술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연구회)’를 압박하다 벌어진 일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연구회는 당시 ‘사법부 개혁’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준비 중이었다. 법원행정처가 일선 판사들의 움직임을 우려, 연구회에 행사 축소를 지시했다는 것이다. 이 판사는 당시 연구회의 기획팀장이었다. 고영한 당시 법원행정처장은 “당사자의 의사에 따른 인사조치”라고 해명했다. 이 판사는 즉각 반발했다. 이후 법원행정처에서 일부 판사를 사찰해 ‘블랙리스트’로 관리한다는 의혹까지 불거졌다.
▲연구회 압박 ‘사실’·블랙리스트는 ‘사실무근’…대법원 발표에 판사들 반발
논란이 커지자 대법원은 진상조사에 나섰다. 지난해 4월 진상조사위원회는 “이규진 당시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고등법원 부장판사)이 이 판사에게 연구회 관련, 부당한 지시를 내렸다”고 발표했다. 다만 ‘사법부 블랙리스트’는 사실무근이라고 결론지었다.
반발은 컸다. 판사 대표 100명은 같은 해 6월 전국법관대표회의를 열고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 해소를 위한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고 결의했다. 그러나 양승태 당시 대법원장은 “추가조사는 없다”고 못 박았다. 이에 차성안 전주지법 군사지원 판사는 사법부 블랙리스트 관련 청원을 포털사이트 다음 ‘아고라’에 게재했다. 최한돈 인천지법 부장판사는 항의의 뜻으로 사직서를 제출했다. 오현석 인천지법 판사는 열흘 넘게 단식을 진행했다. 판사들의 항의에도 양 전 대법원장은 뜻을 꺾지 않았다.
▲ 김명수 대법원장, 사법부 블랙리스트 재조사 지시…재판개입 의혹 등장
지난해 9월, 양 전 대법원장의 임기가 종료됐다. 문재인 정부에서 임명된 김명수 대법원장이 그 뒤를 이었다. 김 대법원장은 앞서 춘천지방법원장으로 재직할 당시 사법부 블랙리스트 관련 진상조사를 강하게 요구했던 인물이다. 김 대법원장은 같은 해 11월 민중기 당시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위원장으로 임명, 추가 조사를 지시했다.
지난 1월22일 사법부 블랙리스트 추가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추가조사위원회는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컴퓨터 내부 문서에서 판사들의 동향을 파악한 문건이 다수 발견됐다”고 밝혔다. 일부 판사의 활동과 학술모임, 재판부의 동향 등을 세세히 파악, 기록한 것이다. 특정 판사들의 성향을 정리해 이를 인사에 반영하는 등 불이익을 줬다는 블랙리스트는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일부 판사들의 동향을 파악한 것이 곧 블랙리스트와 같다는 지적이 일었다.
‘재판 개입’이라는 또 다른 의혹도 제기됐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 판결 선고와 관련 재판부의 동향을 파악한 문건이 문제였다. 문건에는 ‘선고 이전 BH 문의에 대해 우회적·간접적으로 담당 재판부의 동향을 파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BH는 청와대(Blue House)를 뜻하는 약자다. 재판에 외압을 행사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에 대법관 13명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부인했지만 여론은 들끓었다.
▲전교조·강제동원·KTX 재판에 개입?…양승태 “재판 관여·인사 불이익 결코 없었다”
김 대법원장은 지난 1월24일 추가 조사 관련 후속 조치를 약속했다. 그는 “필요한 범위에서 조사 결과를 보완하고 공정한 관점에서 조치 방향을 논의해 제시할 수 있는 기구를 조속히 구성하겠다”고 말했다. 이후 법원행정처장을 비롯, 법원행정처 판사들이 대폭 물갈이됐다. 김 대법원장은 지난 2월 안철상 신임 법원행정처장을 단장으로 한 특별조사단을 구성, 사법농단 관련 재조사를 지시했다.
3개월간의 조사 끝에 특별조사단은 “사법행정권 남용이 의심된다”며 양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에서 작성된 일부 문건을 공개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법외노조 소송과 일제 강제동원 손해배상, KTX 승무원 해고, 통합진보당 해산 등 특정 재판을 거론하며 청와대에 ‘상고법원’ 도입에 대한 협력을 구하려 한 정황이 드러났다. ‘상고법원의 성공적 입법추진을 위한 BH와의 효과적 협상추진 전략’이라는 제목의 문건도 있었다.
다만 특별조사단은 “재판거래는 없었다고 확신한다”며 “뚜렷한 범죄 혐의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렸다. 사법부 블랙리스트에 대해서도 “조직적·체계적으로 인사 불이익을 줬다고 인정할 만한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퇴임 후 침묵을 지키던 양 전 대법원장은 기자회견을 열고 이와 관련 혐의를 모두 부인했다. 그는 “법원행정처에서 부적절한 행위가 있었다는 정황이 사실이라면 그걸 막지 못한 저에게 책임이 있다”면서 “법원의 재판이나 하급심의 재판에 부당하게 간섭·관여한 바가 결단코 없다. (블랙리스트에 따라) 판사들에게 불이익을 준 일도 절대 없다”고 선을 그었다.
▲검찰로 넘어간 사법농단 의혹…법원의 비협조적 태도에 비판 ‘활활’
재판개입 의혹이 커지자 김 대법원장은 장고 끝에 지난 6월15일 검찰 수사에 협조하겠다고 선언했다. 앞서 시민·사회단체 등이 양 전 대법원장 등을 검찰에 고발해 이에 대한 수사가 진행 중이었다. 사법농단에 연루된 현직 법관 13명은 징계위원회에 회부됐다.
검찰 수사 과정에서 사법농단 의혹은 더 불어났다. 양 전 대법원장 시절, 대법원이 허위 서류를 작성해 일선 법원의 공보관실 운영비 수억원을 받아낸 후 이를 ‘비자금’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검찰에 따르면 해당 비자금은 고위법관에 대한 격려금과 상고법원 로비를 위한 자금으로 쓰였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당시 법원행정처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혐의와 관련 법리 검토를 해준 정황도 포착됐다.
그러나 김 대법원장의 약속과 달리 법원의 비협조적인 태도가 도마 위에 올랐다. 검찰 측은 사법농단 관련 자료를 제대로 제출받지 못했다고 불만을 표했다. 사법농단 관계자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도 법원에서 지속적으로 기각됐다. 양 전 대법원장의 주거지에 대한 영장은 4차례나 기각됐다. 법원의 ‘제 식구 감싸기’라는 성토가 나왔다.
여론은 갈수록 악화됐다. 법대 교수들과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학생들은 사법부를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김중배 전 MBC 사장, 한승헌 전 감사원장, 문정현 신부 등 사회원로 및 각계인사 318명과 105개 사회단체 참여한 ‘양승태 사법농단 대응을 위한 시국회의’는 20일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사법농단 규탄 및 행진을 진행했다.
이소연 기자 soyeon@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