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피아니스트가 무대에 올라 피아노 앞에 앉는다. 하지만 건반을 누를 생각은 않고 그저 앉아 있기만 한다. 무대 위엔 한동안 정적이 흐른다. 정확히 4분33초 뒤, 피아니스트는 일어나 무대를 나가버린다. 악보엔 ‘태싯’이라고 적혀 있다. ‘침묵’은 뜻하는 음악 용어로, 일종의 쉼표 같은 역할을 한다. 존 케이지의 ‘4분33초’는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태싯그룹(태싯)은 여기서 이름을 따왔다. ‘4분33초’처럼 혁신적인 음악을 하겠다는 취지다. 장재호와 가재발이 주축이 돼 팀을 꾸렸고, 공연에는 객원 멤버들도 함께한다. 이들은 디지털 테크놀러지에서 예술적 영감을 발견해 멀티미디어 공연, 인터액티브 설치,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의한 알고리즘 아트까지 다양한 작업을 하고 있다.
“이게 적절한 비유인지 모르겠는데…. ‘홍길동’이라는 악기가 있다고 가정해 봐요. 작곡가들은 홍길동을 연주해서 음악을 만들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홍길동을 만드는 과정을 보는 거예요. 홍길동을 연주하는 게 아니라, 컴퓨터가 스스로 연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거죠.”(가재발)
태싯은 다양한 실험으로 예술의 경계를 넓히는 동시에,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접점을 마련하는 데에도 열심이다. ‘게임 오버’(Game Over)나 ‘훈민정악’이 그런 예다. ‘게임오버’는 연주자들이 실제 테트리스 게임을 하며 블록을 쌓는 과정이 음악으로 변환된다. 블록이 높이 쌓이면 높은 음고가 만들어지는 식이다. 그래서 연주자들에겐 게임을 잘하는 것이 최선의 목표는 아니다. “게임에서 이기려면 블록을 평평하게 쌓아야 하는데, 그러면 음악이 재미 없어지잖아요.”(장재호) 블록이 높게 쌓여 게임에서 지면 음악도 끝난다. 이런 측면에서 태싯의 음악은, 살아 움직인다고 볼 수 있다. ‘훈민정악’은 한글을 활용한 라이브 코딩으로 한글 음소에 음을 입힌다.
‘게임 오버’의 테트리스 게임이나 ‘훈민정악’ 안에서 이뤄지는 채팅(라이브 코딩)은 영상으로도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태싯의 모든 음악은 영상과 유기적으로 결합한다. 장재호는 “쉽게 말해 악보를 보여주는 개념”이라고 설명했다. 연주 중인 음악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지, 그 시스템을 영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는 “음의 움직임과 영상 안의 움직임이 일치한다”며 “대신 어떤 법칙이 있느냐는 열심히 봐야 알 수 있는데, 그걸 따라가는 과정이 재밌다”고 귀띔했다.
장재호와 가재발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스승과 제자로 만났다. 장재호는 서울대 작곡과를 졸업한 뒤 네덜란드 헤이그 왕립음악원에서 전자음악을 공부했다. 가재발은 음반 엔지니어이자 테크노 뮤지션이었다. 한국인 최초로 영국 테크노 차트 1위를 차지한 이력도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가재발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는 박규원도 객원 멤버로 태싯에 합류해, ‘3대 사제’가 한솥밥을 먹고 있다.
‘새로운 소리’에 매료돼 팀을 꾸린 것이 벌써 10년 전이다. 태싯은 17일 서울 언주로에 있는 플랫폼엘에서 10주년을 기념한 공연을 연다. 공연에서는 지난 10년간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세 곡과, 비교적 최근 작업한 세 곡을 들려준다. 전자가 태싯의 ‘알고리듬 아트’라는 기본 정신을 드러내는 것이었다면, 새롭게 재창조된 작품들은 ‘사운드 아티스트’로서의 태싯을 드러낸다. 요즘엔 시스템을 정비하고 리허설을 하느라 매일이 바쁘다.
태싯은 대중과 소통하고 싶다. 대중에게 미디어아트의 개념을 쉽게 이해시키는 것은 이들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다. 해외에선 ‘물 만난 고기’가 되는 것 같은데, 국내에선 공연할 무대조차 많지 않다. 가재발은 “(태싯의 작품이) 정말 좋은데 설명할 길이 없다”며 웃었다. 장재호는 존 케이지의 ‘4분33초’ 영상을 찾아보라고 추천했다. “자꾸 접하는 게 좋다”며 “‘4분33초’를 보면서, 이게 음악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시길 바란다”고 했다.
“오히려 중·고등학생들의 반응이 폭발적이었어요. 고정관념 없이 공연을 보는 것 같더라고요. ‘음악은 이런 거야’, ‘미술은 이런 거야’라는 생각을 갖고 계신 분들은, (공연에) 와서 힘들어하시죠. 뭔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게, ‘이게 아름다운 거야’라고 오랜 시간 들어왔기 때문이지 않을까요?”(가재발)
“작품은 자신이 만드는 작은 세상인 거잖아요. 저는 그게 재밌어요. 소리나 시스템처럼 아주 근본적인 것부터 만들어가는 게, 누군가 만들어놓은 작곡법에 따라 음악을 만드는 것보다 훨씬 흥미롭게 느껴집니다.”(장재호)
“저는 2009년에 태싯의 공연을 보고 이 음악에 빠졌거든요. 관객의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창작자가 만들어놓은 세상 안에서 규칙을 찾아내는 게 재밌어요.” (박규원)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