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는 물론 앞선 박근혜·이명박 정부의 화두 중 하나는 ‘규제혁신’이다. 세월이 지나며 낡은 기준과 잣대가 산업계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현장 반응은 ‘불안’과 ‘푸념’으로 점철됐다. 규제혁신이 규제강화로 여겨지고 있어서다.
특히 의료기기업계 현장의 우려가 심각하다. 4차 산업혁명시대를 선도할 산업분야로 첨단바이오·융복합의료기기가 꼽히며 차세대 동력으로 육성·발전시켜야한다며 관심이 집중됐고, 의료기기산업육성법까지 등장했지만, 정작 기업들은 ‘생존’을 고민해야한다고 한탄한다.
1984년, 인성교역이란 이름으로 소모품 의료기기 시장에 첫 발을 들인 후 1993년 법인명을 지금의 ‘인성메디칼’로 바꾸고, 혈관 내 카테터 제품을 시작으로 수액세트 등 실리콘 기반의 의료용 소모품을 생산하며 지난해 265억원의 매출을 기록한 인성메디칼 송준호 대표이사도 규제혁신을 언급할 때면 고개를 저었다.
35년의 전통에 대학병원들이 믿고 구매하는 의료용 소모품 제조업체로 소위 매출 잘나오고 꾸준히 성장하며 해외 진출에 연구개발까지 하는 강소기업 대표가 ‘규제혁신’에 거부감을 가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관건은 ‘속도’였다.
◇ “기본에만 충실하면 된다? 안 된다!”
송인금 회장에 이어 지난해 대표이사로 취임한 송준호 대표는 규제혁신은 분명히 필요하고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전제했다. 단적으로 의료기기는 일반 공산품과 달리 환자의 생명과 직결된 만큼 안전성과 유효성이 확보될 수 있도록 규제가 계속해서 바뀌어야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세계적 기준에 맞춰 국내를 넘어 수출을 할 수 있어야 성장도 가능하다고 부연했다.
문제는 규제혁신이 현장에서 변화를 받아들이고 따라갈 수 있는지를 의미하는 ‘수용성’과 현장이나 시장의 변화를 유도하거나 지원하는 ‘방향성’을 갖추고 있느냐는 점이다. 그리고 송 대표는 지금의 규제혁신이 아쉽지만 이들 요소를 갖추지 못했다고 조심스레 답했다.
이어 업계가 꾸준히 요구해온 건강보험 수가보상형태나, 각종 인증기준의 변화속도, 4차 산업 관련기술에만 집중된 연구개발(R&D) 지원, 몰아치듯 변화하고 제한하는 유통과정의 관리나 리베이트 규제방식 등이 문제라고 꼽았다. 현장에서 느끼기에 정작 바뀌어야할 건 바뀌지 않고, 바뀌어도 속도가 빠르거나, 일관되고 적절한 방식이 아닌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실제 의료기기의 건강보험 수가보상방식의 경우 크게 별도산정과 산정불가로 나뉘며, 소모품의 경우 대부분 의료행위에 가격이 포함된 ‘산정불가’다. 즉, 판매를 했지만 적정가격이 정해지지 않아 구매자가 가격결정에 주도권을 갖게 되는 식이다. 이에 의료기기업계가 지속적으로 오랜 기간 요구해온 개선과제 중 하나지만, 바뀔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다.
반대로, 의료기기의 안전성과 유효성을 입증, 검사, 관리하는 등의 각종 허가·인증·감독 기준은 해마다 강화되는데다 공산품의 기준에 의료기기의 기준이 복합적으로 적용돼 시설이나 관련 인력의 확보 등에 업체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변화를 요구할 뿐 지원은 크게 이뤄지지 않고, 처벌과 제한은 강화되는 실정이다.
이에 송 대표는 “물건을 생산하는 제조업체 입장에서 적절한 가격을 받는 것은 일견 당연하다. 하지만 건강보험 재정이 한정돼 있다고 병원에서 가격을 조절하거나 의사 인건비 등에 밀려 원가에도 미치지 않는 가격을 받게 된다면 새로운 제품을 개발할 의지는 꺾이고 생산을 중단하거나 외국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며 적정보상을 위한 수가체계 개편을 희망했다.
이어 “물건을 만들고 판매하는 것도 과거보다 어려워졌다”며 “규제혁신은 익숙함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글 한줄, 단어 하나 바꿔서 될 것이 아니라 사람을 뽑아 교육시키고, 시설을 개·보수해야하는 투자와 변화가 필요한 일이다. 이에 대한 정부차원의 지원이 어렵다면 속도라도 조절해주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덧붙였다.
◇ 기업의 기술투자는 ‘책임’, 국산화·세계화는 ‘숙명’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서도 인성메디칼은 대구에 부설연구소를 설치한데 이어 원주로 생산설비를 확장이전하고, 영업이익도 아닌 전체 매출액의 10%가량을 연구개발비에 투자하는 등 활로를 개척하고 있다. 최근에는 신제품 개발을 위해 회사가 잘 다루는 실리콘이 아닌 금속재료를 활용하기 위해 금형시설도 갖추고, 국립암센터를 비롯한 대학병원들과도 손을 잡았다.
송 대표는 “임상 의료진과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함께 제품화에 대해 상의해도 10개 중 1개를 성공시킬까 말까지만, 업체 단독으로 제품을 개발할 경우 임상 적용단계에서 괴리가 있을 수 있어 상용화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며 “제품에 대한 신뢰가 높아지며 개선의뢰나 제작요구도 들어오고 있어 수입제품 의존도가 높은 시장의 국산화에 함께 노력하고 있다”고 답했다.
이어 “국내 의료기기 시장은 사실상 수입제품이 이끌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가지 못하면 뒤쳐질 수밖에 없다. 건강보험 수가문제로 인해 의료기관의 묶음판매 요구도 많아 수익에는 도움이 안 되지만 다양한 품목을 갖추고 있어야하기도 한다”면서 “믿어주고 신뢰하는 만큼 보답한다는 의미도 있다”고 첨언했다.
수액세트나 소모품 등의 단가가 높아지며 국내생산이 어려워짐에 따라 제3세계 등에서 제조돼 수입되는 소모품 중 이물이 혼입된 주사팩 등 불량제품 유통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한 투자지만 동시에 국민의 건강에 이바지하고, 의료기관과 의료진이 보내는 신뢰에 보답하려는 책임감의 발로라는 설명이다.
또한, 기술투자에 따라 높아진 기술력을 바탕으로 수출이나 현지화 등의 방식으로 세계시장을 두드릴 때 국내시장의 한계를 극복하고 더 높은 수준의 기술력과 제품을 갖추는 선순환 고리가 완성되는 만큼 여러 시도를 할 수 밖에 없다는 말도 더했다. 그 일환으로 역량을 키우면서도 기존 제품과의 연관성을 고려한 제품을 만들어갈 것이라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회사 홀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아쉬움도 남겼다. 송 대표는 “나름 투자를 하고 있지만 원료 등에 대한 규격이나 안내도 불분명하고, 생산해도 허가 전엔 판매할 수 없다. 시장도 한정돼 수익은 크지 않고, 정부지원은 4차 산업혁명 분야에 집중돼 기존 제조업은 찬밥”이라며 국내 의료기기산업 발전을 위해서라도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오준엽 기자 oz@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