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남자가 사랑할 때’(1994년·감독 루이스 만도키)는 알코올 중독이 가정을 어떻게 붕괴시키는지를 실감나게 묘사한다. 남편(앤디 가르시아)은 술에 중독된 아내(멕 라이언 분)가 알코올의 유혹에서 벗어나도록 돌본다. 영화는 갈등-위기-위기해소라는 영화의 기본 문법을 충실히 따르며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현실의 알코올 중독은 비단 가족의 붕괴뿐만 아니라, 당사자의 자살 및 범죄로도 이어지는 무서운 정신질환인 것이다.
서울 마포의 모임대아파트에서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행사 프로그램명이 독특했다. ‘여의주(輿議酒)’, ‘사랑회(會)’ 등.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마을봉사활동을 하면서 단주(斷酒)를 유지하자는 취지의 지역 활동 모임이다. 행사는 마포구보건소를 비롯해 마포구정신건강복지센터와 SH마포센터가 마련하고 있다. 2012년 이후 매주 수요일마다 이 작은 행사는 계속 열려왔다.
센터가 알코올 중독자에 대한 실효성 있는 치료를 모색키로 한 이유는 지난 2012년 해당 임대아파트 단지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이 계기가 됐다. 4개월여 동안 주민 9명이 자살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확산됐던 것이다.
흔히 ‘알코올 중독’이라 불리는 알코올 사용장애는 반복적인 음주로 인해 성적·공격적 행동, 판단력 손상 등으로 광범위한 신체적 장애 및 심리적 고통을 일으키는 정신 질환이다. 우리나라의 알코올 사용 장애 인구수는 159만 명으로 추정된다. 알코올 사용장애가 무서운 이유는 정신질환 중 가장 유병율이 높기 때문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알코올 사용장애로 인한 진료청구 건수는 2011년 약 28만 건에서 2015년 약 34만 건으로 증가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음주상태에서의 사건 발생 증가, 생산성 감소로 인한 사회·경제적 소실 비용을 약 23조4000억 원으로 추산했다.
알코올 사용장애는 당사자의 알코올성 치매와 성격 변화, 대인관계 단절, 사회적 부적응, 가족의 해체 등으로 인한 자살 사고를 유발한다. 이날 기자가 방문한 서울 마포구도 이러한 술의 위협에서 자유롭지 않다. 마포구정신건강복지센터 관계자는 지역의 고위험 음주율이 16.6%에 달한다고 설명했다.
사회복지사들은 알코올 사용장애가 의심되는 가정을 찾아가 상담서비스를 하고 음주 캠페인도 펴왔다. 성공적인 활동이 바로 이날의 ‘여의주’ 활동과 알코올 중독자들로 구성된 마을봉사공동체인 ‘사랑회’다.
◇ 지원 ‘0’
박정님씨(가명)는 술을 끊은 지 16년이 넘었다. 박씨는 현재 회복자 상담가로 활동하고 있다. 술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단주를 하도록 돕는 게 그의 일이다. “위기가 여러 번 있었죠. 지금 회복자 상담 활동을 하는 것도 극복하는 방법 중 하나예요. 술을 마시지 않고 살기 위한 노력과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자조모임이나 봉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단주 이후 바뀐 삶이 궁금했다. 그가 말했다. “맑은 정신, 제정신으로 살 수 있어요.” 박씨는 일주일에 이틀 상담자로 활동한다. 받는 돈은 시급 만원에 불과하다.
정형남씨(가명)는 동네에서 ‘화가’로 불린다. 소싯적에 정씨는 아이들에게 미술 지도를 했다. 그림을 그리며 습관처럼 마시던 술이 화근이 될 줄은 몰랐다. 사업에 문제가 생기자 술의 양은 더욱 늘었다. 끼니도 거른 채 막걸리를 마셔댔다. 자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현재 그는 한차례 단주 실패 이후 다시 5개월째 술을 끊고 있다.
정씨가 기자를 이끌고 아파트 단지 이곳저곳을 보여줬다. 주민들이 오가며 쉴 수 있는 나무 벤치가 그럴싸했다. 그와 사랑회 회원들의 작품이었다. 나무가 썩어 흉물이었던 벤치는 그의 손을 거치자 말끔하게 뒤바뀌었다. 벤치에는 한 마을 주민이 앉아 다리를 주무르고 있었다.
박인목씨(가명)는 조금 있으면 단주 100일이 된다. 매일 소주 10명을 마셔야 성에 찼다. 그 스스로조차 “정신에 문제가 생겼다”고 할 정도로 매일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닐 때가 많았다. 단지 내 골칫거리였던 그가 바뀌기 시작한 것은 ‘사랑회’에 참여하면서 부터다.
그렇다고 이 모임이 처음부터 순탄하게 운영된 것은 아니었다. 마포구정신건강복지센터 소속 사회복지사 김우형씨가 말했다. “처음에는 찾아가면 고함부터 질러대셨어요. 그랬던 게 한번, 두 번 계속 ‘노크’를 하자, 마지못해 ‘이야기나 들어보자’고 문을 열어주셨죠. 마음을 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날 지역 사회 실습차 학생들도 현장에서 일손을 보탰다. 서울대 간호대 재학 중인 신희수 학생에게 한 마디를 요청했다. “지역 주민들이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서 건강한 생활을 누리자’는 공동의 목표로 노력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함께 할 수 있어서 보람과 행복을 느낄 수 있었어요.”
‘너무 상투적인 것 아니냐’고 기자가 볼멘소리를 늘어놓자, 현장의 모인 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사랑회 사람들의 평균 연령은 60세. 이들은 스마트폰을 촬영한 사진을 출력해 청테이프로 붙이고, 폐자재로 만든 다용도함을 주민들에게 선물할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다. 그 순간만큼은 잠시나마 술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에 열심인 것이다. 한차례 강풍이 불자 애써 붙인 사진이 바람에 뜯겨나갔다. 아스팔트 바닥에 떨어진 사진을 줍는 동안에도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우형씨의 마음은 편치만은 않다. 센터 사회복지사 한 명이 챙겨야 하는 지역 주민은 최소 120명. 매주 하루를 꼬박 이들과 만나면 그만큼의 ‘구멍’이 생긴다. 그렇다고 이러한 자조모임에 ‘특별한’ 예산 지원이 이뤄지는 것도 아니다. 폐품을 얻어 고쳐 쓰고, 센터 내 여분의 물품을 가져와 행사에 사용하는 ‘아랫돌 괴어서 윗돌을 얹는’식의 활동이 자그마치 7년. 김우형씨는 답답함을 토로했다.
“최근 정신질환자의 강력범죄 이후 커뮤니티케어를 비롯해 중앙에서 지역에 하달되는 의뢰권은 쏟아져 업무가 과중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보시다시피 현장은 너무 열악합니다. 지역민 스스로 재활을 위한 노력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줬으면 합니다.”
알코올 회복자들이 마련한 소박한 선물이 한켠에 쌓여 있었다. 두 개의 천막이 전부인 '세상에서 가장 작은 행사'. 그러나 지역내 술로 문제를 겪고 있거나 겪었던 이들에게 적어도 이날만큼은 특별한 하루였을 것이 분명했다.
김양균 기자 ange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