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티스의 비밀 상담소’가 재미없어지는 세상 [넷플릭스 도장깨기⑧]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가 재미없어지는 세상 [넷플릭스 도장깨기⑧]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가 재미없어지는 세상

기사승인 2019-05-18 08:00:00


누군가와 인터뷰를 진행하면 태어나서 처음 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 처음 만난 게 아닌 것처럼 일정 시간 동안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일은 쉽지 않다. 중간에 대화가 끊기기라도 하면 더욱 난처해진다. 누가 이 침묵을 깨주길 기도하며 땀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때 준비한 질문이 큰 힘을 발휘한다. 어떤 질문은 인터뷰이의 인상을 찌푸리게 만들고(0.1초 정도 되는 아주 짧은 순간이다), 어떤 질문은 마법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 만들어 오랫동안 알고 지낸 지인과 잡담하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든다.

인터뷰 질문을 준비하는 요령은 간단하다. 아직 만나지 않은 상대를 상상하는 것. 그가 이 질문을 받으면 어떤 기분일까, 그는 어떤 질문을 받고 싶어할까, 이 질문을 하면 좋은 질문이라고 칭찬해줄까 등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머리를 굴린다. 가끔 상상이 멈추지 않을 때도 있다. 내가 인터뷰에서 이런 질문을 받으면 어떻게 답할까. 예를 들면 이런 질문. “당신이 꿈꾸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요.”

넷플릭스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를 보면서 평생 받을 리 없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제가 꿈꾸는 세상이요?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를 보세요. 거기에 제 답이 있습니다.”

지난 1월 11일 공개된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는 학교 친구들을 대상으로 성(性) 상담소를 여는 모태솔로 고등학생 오티스 밀번(에이사 버터필드)에 대한 이야기다. 성 상담사인 엄마 진 F. 밀번(질리언 앤더슨)을 보며 어깨너머로 습득한 지식으로 상담을 해주지만 매번 성공적이진 않다. 정작 오티스는 여자 친구와 교제 경험도 없을 뿐 아니라 자신의 성 문제로 끙끙 앓고 있는 소년이다. 하지만 짝사랑 상대인 메이브 와일리(엠마 맥키)와 절친한 사이인 에릭 에피옹(슈티 가트와)과 함께 문제에 대한 답을 하나씩 찾으며 성장해가는 과정이 그려진다.

맞다. 조금도 끌리지 않는 내용이다. 짧은 소개글만 봐도 드라마가 어떻게 전개될지 예상할 수 있는 진부한 청소년 성장드라마가 분명했다. 한 가지 독특한 점이 있다면 소심하고 친구가 많지 않은 청소년이 다른 청소년들에게 성 상담을 해준다는 설정이다. 결국 고등학생들의 성 담론을 어느 정도의 수위로 펼쳐낼지가 관건이었다. 너무 과하면 현실성이 떨어지고, 너무 풋풋하면 재미가 없을 가능성이 높았다.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는 고등학생의 범주에 주인공들을 가두지 않았다. 드라마 속 인물들은 어른보다 더 어른스러운 면도 있었고, 의외로 여리고 아이 같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곳엔 세상 어딘가에 있을 법한 마을과 학교가 있었고, 그곳의 이야기를 멀리서 관찰하는 느낌이었다. 예상 가능하다고 믿었던 전개와 설정은 드라마를 따라가는 가이드가 됐다. 독특한 관점에 시야가 흐려져도 안정적인 서사가 불안하지 않게 길을 찾아줬다. 덕분에 처음엔 오티스의 엄마가 아들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보다가, 나중엔 엄마가 왜 오티스의 삶에 개입하는지 화가 날 정도로 몰입할 수 있었다.

가장 놀라운 점은 우리가 ‘소수자’라고 부르는 이들을 다루는 태도였다. 피부색이 다르거나 동성을 좋아해서 사귀는 것 정도는 오티스의 세계에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민감한 영향을 미치는 부와 계급도 세련되게 다룬다. 레즈비언 커플 사이에서 태어난 흑인 남학생이 학교에서 가장 인기 많고 부유하게 등장하는 설정이나, 교장의 아들인 덩치 큰 백인 남학생이 친구가 없어 외로워하는 설정이 눈에 띈다. 없다고 믿었던 편견이 내 안에 있음을 확인하는 동시에 피부색과 취향이 아무런 문제가 되는 않는 드라마 속 세계로 쉽게 빠져들었다.

그렇다고 폭력이나 갈등이 없는 건 아니다. 여느 고등학교처럼 오티스의 학교에도 계급이 존재했고 인기 많은 학생과 없는 학생으로 나뉘었다. 자신이 속한 계급에서 밀려나기 싫어 거짓말을 지어내는 학생도 있었고, 인기보다는 진정한 사랑을 꿈꾸는 학생도 있었다. 외모가 조금씩 다를 뿐 한국 고등학교와 크게 다르지 않은 보편적인 설정이다.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학교 폭력이나 리벤지 포르노, 낙태 등은 용납되지 않았다. 그것이 왜 문제가 되고,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를 아무렇지 않게 보여준다. 해결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방법을 찾기 위해 애쓰는 오티스를 응원하게 만드는 드라마다. 결과와 상관없이 그 과정을 보여주고 한발 더 나아가는 용기를 내는 모습에 주목하는 점도 좋다. 모든 것에 능숙하고 모르는 것이 없어 보이지만, 실제 경험은 많지 않은 고등학생들다운 모습이 그런 장면들에서 나온다.

한국 드라마에서 볼 수 있을 거라 상상하기 어려운 작품이다. 학생들의 현실과 어른들이 바라는 학생들의 모습을 담아내며 재미까지 확보할 수 있을가 싶다. 특히 ‘후방 주의’가 필요한 에피소드의 첫 장면들은 드라마를 과감하게 만들겠다는 제작진의 의지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고등학생 이야기라고 만만하게 보지 말라’고 경고하는 느낌이다.

최근 미국드라마 ‘프렌즈’가 주목받았다. 과거에 재미있게 본 드라마를 다시 보니 불편해서 볼 수 없다는 네티즌들의 증언이 SNS와 커뮤니티에 쏟아졌다. 언젠가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도 그런 드라마가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너무 당연한 얘기여서 드라마가 재미없어지는 날.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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