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버어머가우에서 뮌헨까지는 1시간 반 정도 걸려 4시께 도착했다. 뮌헨은 독일 남부 바이에른 주의 주도이다. 이자르(Isar) 강을 중심으로 발전한 마을들이 통합돼 오늘의 뮌헨을 이뤘다. 2017년 기준 도시인구는 145만6000여명으로 베를린과 함부르크에 이어 독일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다. 특히 예술, 과학, 기술, 금융, 출판, 문화, 교육, 비즈니스 및 관광 등의 세계적 중심지다.
뮌헨이 내세우는 구호는 ‘뮌헨은 당신을 좋아합니다(München mag Dich)’인데, 2006년 이전에는 ‘마음의 세계 도시(Weltstadt mit Herz)’였다. 뮌헨의 중심을 흐르는 이사르 강은 알프스 산맥계에 속하는 오스트리아 티롤 지방의 카르벤델(Karwendel) 산맥에서 발원해 뮌헨 동북동쪽에 있는 데겐도르프(Deggendorf) 부근에서 도나우강에 합류하는 295㎞길이의 강으로 바바리아 지방에서는 도나우 강, 인 강, 마인 강에 이어 4번째로 큰 강이다.
뮌헨이라는 도시이름은 ‘수도사들(Mönchen)’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1158년 프리드리히 1세(Friedrich I) 황제의 아우크스부르크 판결(Augsburger Schied)에 처음 등장하는 무니헨(Munichen)이란 지역이름이 뮌헨을 말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옛 고산지대의 독일어로 ‘수도사들의 거주지’라는 의미라고 한다. 수도원이라는 라틴어 모나키움(Monachium)에서 온 것이다.
소금도로변에 베네딕트 수도회 승려들이 정착한 것이 이 지역에 처음 생긴 정착촌이다. 오늘날 도심에 있는 미카엘 교회가 베네딕트 수도원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 무렵 작센과 바이에른의 공작 사자왕 하일리히(Heinrich der Löwe)가 수도원 가까이에 이자르 강에 소금도로를 연결하는 다리를 세워 통행세를 받았다.
1180년 비텔스바하의 오토 1세(Otto I Wittelsbach)가 바바리아 공작이 된 이래 비텔스바하 왕조는 1918년까지 바바리아를 통치했다. 1314년 독일 왕에 선출된 루트비히 4세(Ludwig IV)가 1328년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됐다. 1632년 신교와 구교간의 30년 전쟁이 벌어지던 1632년 스웨덴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Gustav II Adolph)왕이 뮌헨을 점령했고, 1704년부터 1742년 사이에는 합스부르크(Habsburg)왕국의 지배를 받았다. 1806년에는 바바리아(Bavaria) 왕국의 수도가 됐다.
뮌헨에서의 첫 번째 일정은 BMW 박물관을 구경하는 것이다. 박물관에 가까워지면서 창가에 커다란 경기장이 지나간다. 1972년 뮌헨올림픽의 주경기장이 들어있는 올림픽공원(Olympiapark)이다. 85헥타르(ha) 넓이의 올림픽 공원에는 다목적 기능을 가진 올림픽 홀, 주경기장을 비롯한 각종 경기장과 선수촌(Olympisches Dorf), 프레스센터, 그리고 올림픽 타워 등이 있다.
올림픽공원이 있는 밀베르트호펜 암 하트(Milbertshofen-Am Hart) 지역은 1913년에 뮌헨으로 통합됐다. 1938년까지 뮈니히-오베르비센펠트(Munich-Oberwiesenfeld)라는 상업 공항이 있었다. 1939년 10월 무니히-리엠(Munich-Riem) 공항이 문을 연 이후로는 독일공군이 사용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폭격이 이어져 폐허 위에 서 있는 언덕이라는 의미의 독일어, 트뤼머베르크(Trümmerberg)라고 부르던 이곳은 종전 후부터 미 육군이 사용하다가 1957년 폐쇄됐다.
1968년부터 1972년 사이에 건설된 뮌헨올림픽 주경기장은 8만석 규모로 올림픽이 끝난 뒤 2005년까지는 FC 바이에른 뮌헨팀이 홈구장으로 사용했다. 1968년 완공된 올림픽 탑(Olympiaturm)의 높이는 291m로 무게는 5만2500톤이다. 190m 높이에 전망대가 있고, 다양한 기념품을 전시하는 작은 로큰롤 박물관이 있다. 또한 182m의 높이에는 230명이 동시에 들어갈 수 있는 회전 레스토랑이 있다. 2005년부터는 텔레비전 방송의 중계시설이 들어있다.
독일의 문화비평가 고트프리드 납(Gottfried Knapp)은 2016년 11월 25일자 쉬드도이체 자이퉁( Süddeutsche Zeitung)에 기고한 기사에서 “뮌헨 올림픽 공원은 독재와 전쟁을 경험한 독일 사람들이 발전시킨 정신적 자유와 쾌활한 개방성을 담은 상징적 건축물입니다. 따라서 올핌픽 건축물들(Olympiabauten)은 독일연방 공화국의 진정한 상징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라면서 ‘세기말 세계문명에 대한 독일의 가장 중요한 공헌’이라고 설명했다.
가이드가 올림픽 공원에 대한 설명을 별도로 하지 않은 것은 1972년 뮌헨올림픽이 피로 얼룩진 비극의 장이었기 때문일까? 1972년 9월 5일, 팔레스타인의 테러단체인 ‘검은 9월단’ 소속 테러범이 올림픽 선수촌의 이스라엘 대표팀 숙소에 난입해 선수 1명과 코치 1명을 살해한 뒤, 남은 9명을 인질로 붙잡는 사건이 벌어져 올림픽 경기가 중단되기도 했다.
검은 9월단은 이스라엘에 수감된 팔레스타인 양심수 234명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스라엘 수상 골다 메이어는 이 요구를 거절하고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 사태를 해결하겠다고 서독 측에 양해를 구했다. 하지만 서독은 외국군이 자국 내에서 군사 활동을 금하는 법률에 의거, 이스라엘의 요청을 거부했다. 이후 서독의 테러대응팀은 테러단과 인질들을 뮌헨 국제공항을 통해 이집트로 보내기로 합의하고는 뮌헨국제공항이 아닌 공군기지로 테러리스트와 인질을 옮겨 진압한다는 대응방안을 마련했다.
문제라면 테러단의 규모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대응팀의 선제공격으로 테러단 8명 가운데 5명은 사살됐지만, 살아남은 테러리스트의 대응으로 인질 전원과 서독 경찰 1명이 사망하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는 것. 사건 후 희생된 이스라엘선수단에 대한 추모식을 거행하고 올림픽경기는 34시간 만에 재개됐다.
한편, 이스라엘 정부는 이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팔레스타인 게릴라 기지를 폭격했고, 수백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죽었다. 또한 사건에 대한 보복과 테러의 재발 방지를 위해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가 중심이 돼 검은 9월단 요원에 대한 암살을 행했다. ‘신의 분노’라고 명명한 작전의 수행과정에서 20명 이상의 팔레스타인 무장조직에 속한 사람들이 암살됐지만, 검은 9월단과 무관한 사람들이 살해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 이스라엘 정부나 모사드는 작전에 대한 공식입장을 표명한 바는 없었다.
올림픽공원에서 조금 더 가면 BMW박물관이 있다. 하지만 박물관은 구경도 못하고 홍보관만 구경하고 말았다. 3개의 원통을 모아놓은 모양의 BMW 본사 건물 옆에 있는 BMW박물관은 샐러드 그릇 혹은 흰 가마솥이라는 별명을 가졌는데, 아래층 지름이 20m이며 맨 위층은 40m의 원형 건물이다. 박물관에서는 엔진, 터빈, 항공기, 오토바이 및 차량 등 다양한 탈것들을 제작해온 BMW의 기술적 발전을 볼 수 있다. 박물관은 뮌헨올림픽 이후 1973년에 개관했지만, ‘BMW 세계(BMW Welt)’ 건설과 관련해 2004년부터 2008년 사이에는 폐관한 바 있다.
우리 일행이 찾은 곳은 바로 BMW 벨트(Welt)였다. BMW본사 사옥, 박물관 그리고 공장 등이 들어선 복합단지 안에 전시, 배달, 모험, 박물관 및 이벤트를 결합한 장소로 기획된 BMW 벨트는 2003년 착공해 2007년 여름 완공됐다. 지붕에 800㎾ 규모의 태양광발전시설을 탑재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건물은 BMW의 최신 모형을 전시할 뿐 아니라, 판촉상품과 액세서리를 판매하는 상점, 레스토랑 등이 들어있는 종합 홍보관이다. 지금 타고 있는 국산차도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는 필자는 BMW차에는 관심을 둘 이유가 없었기 때문인지 무려 1시간이나 얻은 BMW 세계에서의 자유시간을 보내는 것도 고역이었다.
5시 반 무렵, 오페라하우스 근처 골목에서 버스를 내려 호프브로이하우스(Hofbräuhaus)를 찾아갔다. 호프브로이 건물 주변에는 맥주를 파는 카페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뮌헨의 대중적인 왕실맥주인 스타트리헤스 호프브로이하우스(Staatliches Hofbräuhaus)는 호프브로이 뮌헨(Hofbräu München)이라고도 하는데, 바이에른 주가 소유주인 오래된 맥주양조장이다.
호프브로이하우스는 1589년 바바리아 공작 빌헬름 5세(Wilhelm V)가 설립했다. 뮌헨의 맥주가 맛이 없다며 작센에서 맥주를 사다 마시던 빌헬름 5세가 아예 집근처에 맥주양조장을 세운 것이다. 한편, 호프브로이하우스의 맥주는 1516년 제정된 맥주순수령(Reinheitsgebot)에 힘입어 빠르게 성장했다.
보리와 홉과 물만을 사용해야 한다고 정한 맥주순수령은 1487년 바이에른 공작 알브레트 4세가 처음 제정했던 것을 빌헬름 4세가 공국의 모든 사람들이 이 순수령을 따라야한다고 공포한 것이다.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이스트의 사용은 훗날 추가됐다. 빵과 맥주의 원료인 밀과 호밀을 두고 제빵소과 양조장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밀과 호밀은 빵을 제조하는 데만 사용함으로써 빵값을 안정화시킬 수 있다는 당국의 정책적 고려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첨가물이나 보존제 사용을 금함으로서 타 지역의 맥주를 바바리아 지방에 들여올 수 없는 장치도 됐다. 반면 북부독일의 매운 맥주나 체리 맥주와 같은 다양한 맥주가 사멸되는 부작용이 있었다.
초저녁부터 맥주를 마실 상황이 아니라서 장사하는 가게에 선뜻 들어서기가 조심스러웠다. 일단 조심스럽게 호프브로이하우스 안에 들어섰지만, 일행 모두가 우르르 들어서는 모습이 남들이 보기에는 마치 시가전에 돌입한 전투요원 같았을 것 같다. 막상 들어선 카페의 매장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오가는 점원들이나 맥주를 마시는 손님들 모두 우리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리저리 몰려다니면서 사진을 찍어대는데도 말이다. 눈치를 보면서 셔터를 누른 탓인지 사진들마다 초점이 맞지 않거나 실내라서 빛이 충분하지 않아 흐릿한 모습이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