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쿡리뷰] ‘헤로니모’ 낯선 쿠바 혁명 투사의 익숙한 이야기

[쿡리뷰] ‘헤로니모’ 낯선 쿠바 혁명 투사의 익숙한 이야기

‘헤로니모’ 낯선 쿠바 혁명 투사의 익숙한 이야기

기사승인 2019-11-14 07:00:00


제목과 포스터, 감독과 등장인물까지 모두 낯설기만 하다. 쿠바의 2세대 재외동포 헤로니모 임에 대해 알고 있는 한국인이 몇이나 될까. 감독 역시 미국 국적의 재외동포라 영어로 가득한 영화을 이해하려면 한국어 자막이 필요하다. 93분의 러닝타임은 낯섦을 익숙함으로 바꿔놓는다. 누군가의 삶과 그 가족의 흥미로운 이야기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는 마법을 부린다.

‘헤로니모’는 우연한 만남에서 시작하는 이야기다. 미국 뉴욕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한국계 미국인 전후석은 2014년 미국과 쿠바의 관계가 정상화 된 후 다음해 쿠바로 여행을 떠난다. 처음엔 단순히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그가 쿠바에서 처음 만난 쿠바인은 한인 4세 쿠바인 패트리샤 임이었다. 한인 재외동포라는 공통점으로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전후석은 패트리샤의 아버지인 헤로니모 임(임은조)의 이야기를 듣고 호기심을 느끼게 된다.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쿠바 혁명의 중심에 섰던 헤로니모에게 깊은 인상을 받은 전후석은 다시 쿠바를 방문해 이들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겠다고 결심한다.

‘헤로니모’는 헤로니모 임이라는 한 인물의 일대기를 꼼꼼하게 따라가며 한인 교포의 정체성을 탐구한다. 흥미로운 건 쿠바의 근현대사와 가장 가까이에서 호흡하며 삶을 보낸 헤로니모의 이야기가 결국 한국 근현대사와 긴밀하게 연결되는 지점이다. 그의 가족이 쿠바에 정착하게 된 순간부터 쿠바 한인회를 꾸리는 순간까지 늘 그랬다. 한국의 정치적인 상황들이 지구 반대편 타국의 교포들에게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핏줄과 국적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또 노년에도 현재 눈앞에 놓인 세계를 직시하며 정치적 이념과 종교에 대해 고민하는 헤로니모의 모습은 숭고함까지 느껴진다.

그렇다고 ‘헤로니모’가 작품적인 의미로만 기능하는 영화는 아니다. 감독은 흥미로운 도입부를 거친 후 하나씩 본격적인 이야기를 능숙하게 펼쳐낸다. 자칫 감정을 이입하기 쉬운 헤로니모 임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주변인들의 증언과 자료를 토대로 객관적인 이야기를 빠르고 정확하게 전달한다. ‘헤로니모’가 완성도 높은 다큐멘터리가 된 건 변호사를 그만두면서까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열정을 불태웠을 전후석 감독의 공이 크다. 이 이야기를 널리 알려야겠다는 감독의 진정성이 매 순간 느껴진다.

‘헤로니모’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살고 앞으로도 한국에서 살아갈 한국 관객들을 의식하거나 부연하려고 하지 않는다. 한국 감독이었다면 불가능했을 시각과 접근 방법을 감상하다 보면, 멀게만 느껴졌던 100년의 디아스포라 역사가 결국 우리의 이야기라는 걸 느낄 수 있다. 전체 관람가. 21일 개봉.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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