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표의 ‘사진 하나 생각 하나’] 자기 변화는 순간 포착서 시작

[박한표의 ‘사진 하나 생각 하나’] 자기 변화는 순간 포착서 시작

기사승인 2019-11-16 09:50:19

어제 하루 종일 흥얼거렸던,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에 나오는 "지금 이 순간"의 원곡은 "This is the moment"이다. 난 'the moment"란 단어를 좋아한다. 한국 말로는 '때' 또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공간은 시간에 따라붙는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씨줄'과 공간이라는 '낱줄'이 교차하는 지점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을 정지시키기 위해서는 둘의 공통분모인 사이, 즉 간(間)을 우리는 잘 포착해야 한다. 이것을 '순간'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은 그 '순간'을 잘 포착해 가며, '순간'을 사는 것이다. 그 순간을 우리는 '찰나'의 시간이라고도 한다. 식물들은 순간순간 자신의 색깔과 자기 몸의 구조를 다채롭게 변화시킨다. 가을 끝자락에서 식물들은 말없이 우리들에게 보여준다. 참고로 '찰라'는 불교에서 시간의 최소단위를 나타내는 말이다. 산스크리트의 '크샤나', 즉 '순간'의 음역이다. 1찰나는 약 0,013초로 75분의 1초를 말한다.

이 변화를 인식하는 순간을 영어로 '모멘트(Moment)'라 한다. 사실 이 모멘트는 라틴어 '모멘텀(momentum)'에서 유래한다. '모멘텀'은 '움직임/움직이는 힘/변화' 또는 '순간'이라는 의미이다. 농담으로, 새 중에서 가장 빠른 새가 '어느새'라고 한다. 순간의 변화, '어느새', 모든 생명의 움직임은 변화가 일어난다. 순간(瞬間)은 '눈 깜짝할 사이', 눈을 떴다 감는 그 사이이다. 우리는 흘러가는 양적인 시간을 그리스어로 크로노스(chronos)라 하고, 영원한 질적인 시간을 '카이로스(kairos)'시간이라고 한다. 카이로스 시간은 질적인 시간, 한 번 밖에 일어나지 않지만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시간이다. '결정적 순간'이다. 결정해야 할 경계에 선 사람만이 이 카이로스 시간을 만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시간을 두 종류로 나누어 이해했다.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가 그것이다. 크로노스는 객관적·물리적 시간이라고 하고, 카이로스는 주관적·심리적 시간이라고 한다. 이 두 시간을 흐르는 방향의 차이로 설명할 수도 있다. 크로노스는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시간이다. 반대로 카이로스는 미래에서 현재로 거슬러 흐르는 시간이다. 미래의 어떤 특정한 시점에 서서 현재를 돌아보는 것이 카이로스 시간이다. 카이로스는 때가 오기를, 그날이 오기를 기다리는 시간이다. 우리의 기원과 소망이 투사된 미래의 사건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그날이 언제 어떻게 올지 모르기 때문에 이 시간을 사는 사람들은 긴박하고도 간절한 삶을 산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동굴의 비유'를 통해 하찮은 순간이 영원한 순간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극적으로 잘 보여준다. 사람들은 동굴 안에서 묶인 채로 진실이 아닌 허상, 즉 그림자를 실재하는 것으로 믿고 산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람이 '진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에 의문을 품고 자신을 속박했던 족쇄를 부순다. '한 순간에(suddenly, 불현듯이-불을 켜서 불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갑자기 어떠한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는 모양, 느닷없이)' 낯선 현실을 만나고 고통스러워한다. 이것은 과거와 단절해 새로운 시작을 여는 '갑자기/한 순간에', '결정적 순간'에 일어난다. 이 순간이 우리의 타성과 게으름을 일깨우며 한 곳에 의미 없이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돌리게 한다. 그래야 그림자의 허상이 아닌 빛이 일깨우는 진실과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 변화는 모멘텀, 바로 지금 이 순간을 포착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러니 소중한 순간순간을 의미 없이 흘려 보내고 있다면, 고통이 따르더라도 이 순간에 집중해 자신만의 빛을 찾아야 한다. 나를 정직하게 만나야 한다. 그 때가, 오늘 공유하는 시의 "거룩한 식사"의 시간이기도 하다.


거룩한 식사/황지우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점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 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 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세상 떠넣어 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 혼자 밥 먹는 자들
풀어진 뒷머리를 보라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 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박한표(대전문화연대 공동대표, 경희대 겸임교수)

최문갑 기자
mgc1@kukinews.com
최문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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