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안익태가 친일·친나치라고? (Ⅰ)

[특별기고] 안익태가 친일·친나치라고? (Ⅰ)

기사승인 2019-12-02 15:24:23


안익태가 친일·친나치라고? ()

                                                                                               안양대학교 안용환 석좌교수/박사


안익태가 친일·친나치라고 취급받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일본에서 활동할 때 일본연예협회의 연예증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연예증을 발급받지 못하면 음악활동을 할 수 없었다. 독일에서도 친나치 단체인 제국음악협회 회원이 아니면 독일은 물론 유럽에서도 음악활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술활동의 기본조건을 아무도 무시할 수 없었다.

두 번째로 일본 외교관인 에하라 고이치와의 친밀한 관계와 또 독일의 제국음악협회 회장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돈독했던 사제지간의 관계 때문에 친일과 친나치의 오해를 받긴 했지만 유심히 살펴보면 정치적인 목적이 전혀 없고 예술적인 인간관계를 맺고 활동했다.

1. 안익태의 이력

안익태는 1906년 빈농 출신 아버지 안덕훈, 어머니 김정옥 사이에 7형제 중 셋째로 평양에서 태어났다. 8살에 산정현교회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할 정도로 음악의 천재였다. 1918년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그 이듬해 3·1운동이 일어나자 이 운동에 가담하고 구속된 동문들을 구하려다 퇴교 당하였다. 그 후 숭실중학교 교장 모우리(E.M. Mouly)의 주선으로 191910월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세이소주중학교(正則中學校)를 졸업하고 1926년 국립 동경음악학원에 입학, 첼로 전문가로 나섰다. YMCA 건립기금을 위해 1928년 서울, 개성, 평양, 대구 순회공연을 했다. 한나 포드(HD. Hana ford) 선교사의 도움으로 1930년 미국으로 유학하여 신시내티 음악원에 입학하여 수학했고 1933년 필라델피아의 템플대학에 편입하였다.

미국 유학시절 코리아환상곡을 작곡하여 뉴욕 카네기홀에서 독주회를 가졌다. 1936년 유럽으로 이주하여 1944년 스페인으로 옮긴 후 마요르카 교향악단 상임지휘자로 활약하였다. 38세에 그곳에서 결혼하여 정착했다. 해방이 되자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1955년 문화훈장 제1호를 받았다. 스페인에서 사망했다.

영국 국가(國歌)-올드랭사인-안익태의 애국가가 크게 다른 음악이 아니며, 근대문명 추구에 부합되는 것으로 안익태의 사상적으로는 개회민족주의로 평가받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 <애국가> <코리아환상곡> <논개> 등이 있다.

2. 이 일을 어찌할꼬

현행 애국가를 버리고 새로 제정하자는 일부 정치인의 주장이 간헐적으로 있어 왔다. 고종은 독일인 에케르트로 하여금 국민 역량을 하나로 모으기 위하여 대한제국 애국가를 만들게 하여 190271일자로 공식 제정하여 반포하였다.

이에 앞서 1896년 처음으로 국가(國歌) 제정운동이 반일·항일 정신적 지표로 삼기 위해 독립협회와 우국지사들이 앞다퉈 혹독한 일경의 눈과 탄압을 피하면서 차명과 무명으로 경쟁을 벌인 결과, 안익태가 1930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미국에 도착하여 황사선 목사로부터 현행 애국가 가사를 넘겨받으면서 4~5년간 연구 끝에 1936년 작곡을 완료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유관 독립기관에 알림으로써 국민의 공감대를 얻으면서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안익태의 애국가를 국가(國歌)에 준하는 곡으로 선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군과 의병들에게는 국권회복의 정신적 결속으로, 6·25와 냉전시대에는 멸공의 전위대로, 민주화운동 때에는 자유와 민주주의 꽃으로, 산업화운동 때에는 경제번영의 가사로 활용되어 왔다.


현행 애국가를 버리지 못할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19193·1운동의 도화선이 된 친일 이광수가 쓴 동경유학생 2·8독립선언서와 이광수가 쓴 수많은 베스트셀러의 문학작품은 읽어야 하나, 안 읽어야 하나 참으로 고통스럽다.

1919년 친일인사 최남선이 쓴 기미독립선언서는 버려야 하나, 사용해야 하나 참으로 지난(至難)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어디 그뿐인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가슴에 일장기를 달고 손기정 선수는 금메달, 남승룡 선수는 동메달을 목에 걸었으니 이 일은 어떻게 해석해야 될지 참으로 난감하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는 임시정부의 법통을 승계한다고 하였는데 임시정부는 안익태 곡 애국가를 사용한다고 결의했다. 속기록에 정확히 적혀 있으니 이 일은 어찌하나.

3. 에하라 고이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의 관계

일본인 에하라 고이치는 안익태의 후원자요 독일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안익태와 사제지간이다. 이 두 사람 때문에 안익태를 친일·친나치라고 분류하는 결정적인 이유다.

에하라 고이치((江原綱一1896~1969)는 동경제대를 졸업하고 1932년 만주국 건국 이후 하얼빈의 총무처장(1935~1937), 하얼빈 부시장(1937~1938)을 지낸 뒤 1938년 주 베를린, 헝가리, 루마니아, 핀란드, 만주국 공사관을 겸임한 외교관으로 독일에 가 있었다.

안익태는 1941년 루마니아 어느 음악연주회에서 에하라를 숙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그는 일·독 협회가 안익태를 후원하도록 주선했고 스케줄을 관리해주는 매니지먼트 역할을 하면서 안익태는 1941~19444월까지 에하라의 베를린 사저(私邸)에 기거하면서 그와 밀착관계를 이루면서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며 친일의 대명사가 된 일본곡 <에텐라쿠(月天樂)><만주환상곡>도 곡을 만들고 지휘했다.

만주환상곡의 마지막 악장 합창 부분의 가사는 만주국 공사 에하라가 쓴 것이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에하라도 음악 애호가로 외교관이자 음악의 전문성을 가진 사람이다. 안익태와의 교류와 친분관계도 정치적으로 맺은 인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로지 두 사람은 음악인으로 친밀했고 돈독한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두 사람은 음악에 미쳤지 정치에 미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친일이 아니라는 입증이다.

또 하나 주목할 인물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1864~1949)이다. 그는 1933년에 나치단체인 제국음악협회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또한 동맹국인 일본의 황제를 위한 일본 축제음악도 작곡하였고 히틀러의 오스트리아 합병 5주년을 기념하는 <도시 비인의 축제음악>을 쓰기도 하였다. 이러한 모든 것이 작품활동의 자유화를 얻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을 것이다.

그는 안익태와 스승과 제자 관계를 만든 아주 돈독한 관계이다. 슈트라우스는 지휘자로서 안익태의 실력을 깨끗이 인정한다는 증서를 자필 서명하여 주기도 했다. 이런 끈끈한 두 사람이 만나게 된 동기에 아주 순수한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아침 안익태는 음악학교 연습실에서 그의 첫 교향곡 작품인 강천성악(降天聲樂)을 연습하고 있을 때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그 연습실 앞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한 학생에게 물었다. “이것은 도대체 어떤 작품이며 누가 지휘하고 있는가?” 그 학생이 안익태라고 말해 주었다. 안익태의 음악 자질을 높게 평가하며 사제지간을 맺는데 큰 동기가 되었다.

강천성악은 무엇인가. 세종대왕께서 영감을 받아 아악을 작곡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으로 유교의 예악사상이 담긴 것이다. 안익태가 독일에 유학하고 있을 때 에텐라쿠(월천악)를 개작한 것으로 지금 서울 종묘에서 제사 지낼 때 쓰이는 종료제례악이 세종대왕의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다. 원래 <에텐라쿠>는 일본 천황 즉위식에서 축하작품으로 연주된 것이다. 이것 때문에 안익태를 친일인사로 낙인찍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안익태는 음악의 열정으로 슈트라우스를 만나기 위해 초면에 그의 집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우연히 연못에 빠진 슈트라우스의 손녀를 구해주었다. 이를 계기로 그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음악열정을 무시하고 정치 잣대로 친일 운운할 수 있겠는가?

일본 천왕을 높이 찬양하는 만주축전곡은 독일의 슈트라우스가 작곡을 했고 그 곡의 지휘를 안익태가 했다. 이런 장면도 친일이라는 정치적 잣대로 판단하지 말고 사제지간에 예술을 협연했다고 볼 수는 없을까? 하는 것이다.


안익태는 스스로 일제에 협력하지 않았지만 강압 속에서 예술 활동을 하기 위한 방편으로 일제를 활용하였음이 곳곳에 눈에 띈다. 그런 가운데서도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것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한국환상곡>의 작곡자임을 알리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일제와 나치의 눈을 살피지 않고 한국을 떳떳하게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안익태는 <한국환상곡>1936년 독일 베를린에서 작곡하였고 그 내용은 단군의 개국을 알리는 서정적인 선율로 시작하여 한국은 일본의 침략으로 나라를 잃었으니 일본과의 항쟁 끝에 언젠가는 광복을 맞이한다는 대서사시이다. 한국에는 1961년 서울시립교향악단과 KBS교향악단 합동으로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연주한 바 있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안익태를 어떻게 친일로 볼 수 있는지 묻고 싶다.

4. 안익태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자부심이 대단했다

안익태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잃지 않았다. 혹자는 그의 작품 강천성악(降天聲樂)’이 일본 궁정음악(宮廷音樂) ‘에텐라쿠(月天樂))’의 주제 선율을 그대로 본뜬 것이고 그가 작곡한 교향적 환상곡 교쿠토(極東)’만주국은 일본을 찬양하는 작품이라는 이유로 그를 친일파라 주장한다.

안익태는 처음부터 생각을 달리했다. 세종대왕 때 우리의 아악이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생각하고 있다. 즉 일본 아악의 원조가 조선시대의 우리 음악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런 자부심을 갖고 식민지 생활을 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한국환상곡을 작곡한 안익태는 제목만 바꾸어 교쿠토’ ‘만주국으로 활용했다. ‘한국환상곡’ ‘교쿠토’ ‘만주국이 세 곡을 연결해주는 공통 요소는 우리민요 방아타령 선율에 해당된다. 결과적으로 교쿠토’ ‘만주국한국환상곡의 개작에 불과하다.

안익태에게는 그 곡 모두가 한국환상곡은 우리의 아악이라고 평하고 있다. 사상적으로 괴로울 때 단군의 개국을 생각했고 세종대왕을 생각했고 종묘제례악을 생각했다. 우리나라의 고전음악을 세계만방에 알렸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일제 때문에 누구에게도 말할 수가 없었다. 이런 안익태에게 과연 친일이라는 멍에를 씌울 것인가.

5. 그의 생애를 보면 음악만을 위해 태어났다

안익태는 친일이든 친나치든 태생(胎生)적으로 정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음악만을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다. 19363~4개월 그의 일정을 잠깐 살펴보자.

193669일 유럽순회 연주 및 비엔나의 바인가르트너에게 작곡법과 지휘법을 배울 목적을 가지고 유럽으로 향한다. 그의 여행일정을 보면 618일부터 25일까지 베를린에 머물렀고, 25일부터 28일까지는 라이프치히에 머물렀다. 28일 비엔나에 도착하여 음악활동을 하다가 8월에 베를린으로 다시 가서 올림픽에 출전한 손기정 선수를 비롯한 10여 명의 조선 선수와 함께 자기가 작곡한 애국가를 함께 부르며 격려하고, 파리와 영국으로 가서 첼로연주회를 가진 후 10월 초순에 다시 뉴욕으로 돌아갔다. 어느 장소에서든 틈틈이 유명 지휘자에게 가르침을 받는 등 그의 일정은 음악 스케줄로 꽉 차 있었다.

한국인의 긍지로 한국의 음악외교관으로 32개국을 넘나들면서 음악활동을 하였다. 그것이 친일·친나치로 비춰졌다면 일제강점기를 거친 비운의 운명을 안고 태어난 원죄가 아니겠는가?

 

 

정수익 기자
sagu@kukinews.com
정수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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