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오후 서울 경인로 고척 스카이돔에서 열린 록 밴드 U2의 내한 공연 현장. 가로 61m, 세로 14m의 초대형 전광판에 역사를 바꾼 여성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 이태영,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나혜석, 영부인 김정숙, 국내 ‘미투’(Me too·성폭력 피해 고발) 운동에 불씨를 댕긴 검사 서지현, 그리고 故 설리…. 전광판엔 “우리 모두가 평등해질 때까지는 우리 중 누구도 평등하지 않다”는 문구가 새겨졌다. 43년 만에 처음 한국을 찾은 U2가 팬들을 위해 준비한 메시지였다.
“전 세계의 여성들이 하나가 돼 ‘히스토리’(History·역사)를 ‘허스토리’(Herstory)로 다시 쓰는 날이 올 때, 그때가 아름다운 날입니다.” 보컬 보노는 외쳤다. 그는 “인간의 권리(Human rights)가 인간의 과오(Human wrongs)를 바로 잡는 때가 아름다운 날”이라고도 했다. 이어 부른 노래는 ‘울트라 바이올렛’(Ultra Violet)/ 구원으로서의 사랑을 노래한 곡이다. U2는 “사랑은 더 높은 차원의 법”(love is the higher law)라고 역설했다. 혐오가 놀이가 된 시대, U2의 정치란 이런 것이었다.
U2는 1976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결성돼 43년째 원년 멤버로 활동 중인 전설적인 록 밴드다. 국내에서 공연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공연기획사 라이브네이션코리아에 따르면 이날 현장에는 2만8000여명의 관객이 몰린 것으로 추산된다. U2는 자신들의 다섯 번째 음반 ‘더 조슈아 트리’(The Joshua Tree) 발매 30주년을 기념한 ‘조슈아 트리 투어’ 연장 공연의 일환으로 이번 공연을 준비했다.
네 명의 시인들이 무대에 등장한 건 오후 7시20분에 이르러서였지만, 공연장엔 일찍부터 시(時)들이 흘렀다. 한국전쟁의 비극적 단면을 그린 이시영 시인의 ‘지리산’, 버락 오바마 미국 전 대통령의 취임식에서 낭송된 엘리자베스 알렉산더의 ‘프레이즈 송 포 더 데이’(Praise Song for the Day), 아프리카계 미국인 시인 랭스턴 휴즈의 ‘아이 투’(I, too) 등 전광판에 나타난 시들이 공연의 서문 역할을 했다.
남북 이념 갈등이 낳은 ‘지리산’의 아픔은 보노의 “북쪽(북한)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사랑한다’는 말을 전한다”는 인사로 보듬어졌다. 흑인 인권가들의 시는 마틴 루터 킹 목사를 기리는 노래 ‘프라이드’(Pride)로 이어졌다. 밴드가 ‘엑시트’(Exit)를 부를 땐, 트럼프라는 이름의 남성이 시민들에게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거대한 벽을 짓자’고 선동하는 내용의 흑백영상이 전광판에 상영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향한 통렬한 풍자였다.
U2는 ‘더 조슈아 트리’ 수록곡들을 공연 중반부에 배치하고, 앞뒤에 히트곡을 덧붙이는 형식으로 공연을 꾸렸다. ‘프라이드’가 끝나고 ‘웨어 스트릿 해브 노 네임’(Where Streets Have No Name)가 시작될 땐 마치 다른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전광판엔 황량한 사막이 펼쳐지고, 전광판 위아래를 수놓은 수십개의 조명들이 발광했다. U2는 이번 공연에 화물 전세기 3대 분량의 장비를 공수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스태프 수는 150여명에 달한다.
60세의 노장들은 그러나 힘이 넘쳤다. 드럼과 기타가 맹렬하게 달려들면 보노는 호랑이처럼 노래했다. ‘엑시트’를 부를 땐 그로테스크하게 몸을 꺾어대더니 이내 털썩 무릎을 꿇었다. 아르헨티나 군부독재에 저항하다가 실종된 사람들을 위한 노래, ‘마더스 오브 더 디스어피어드’(Mothers of the Disappeared)를 부르기 위해서였다. 전광판 속 영상에선 실종자들의 어머니가 촛불을 들고 섰다. 노래가 흐를수록 촛불은 스러졌지만, 공연장은 오히려 밝아졌다. 관객들이 어머니들을 대신해 휴대폰 플래시를 켠 까닭이었다. U2와 관객들이 함께 완성한 평화와 화합의 메시지였다.
마지막 곡은 예상대로 ‘원’(One)이었다. 보노는 “평화로 가는 여정에서 배운 것이 있다. 가장 강력한 단어가 ‘타협’(compromise)이라는 것”이라며 “평화로 향하는 길은 우리가 하나가 돼 노력할 때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9일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접견한다. 문 대통령의 아내 김정숙 여사는 이날 공연장에서 하루 일찍 U2 멤버들을 만났다. 김 여사는 공연에 앞서 보노와 환담을 가진 것으로 전해졌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