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장에서 리가시청 부근까지 이동한 다음에 1시간여의 자유시간을 가졌다. 아내와 의논한 끝에 국립미술관을 보기로 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국립미술관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구글지도가 큰 도움이 됐다. 2㎞가 넘는 거리였지만 18분이 걸렸다.
라트비아 국립미술관(Latvijas Nacionālais mākslas muzejs)은 바로 옆에 있는 라트비아 예술 아카데미(Latvijas Mākslas akadēmija)와 함께 리가 에비뉴 서클 안에서 주목할 만한 역사적 건물이다. 라트비아 국립미술관은 라트비아를 비롯한 발트연안국가 그리고 러시아 화가와 조각가들의 예술작품을 5만2000점 이상 보유한 라트비아 최대 미술관이다.
미술관 건물은 독일건축가 빌헬름 노이만(Wilhelm Neumann)의 설계로 1903~1905년 사이에 건설됐다. 석회암, 사암 그리고 화강암을 사용해 바로크 양식으로 지은 건물로 리가의 마지막 절충주의 건물 가운데 하나다. 실내 장식은 아르누보적 요소가 가미됐다. 역사적으로는 1869년에 문을 연 시립 유화 갤러리(Pilsētas gleznu galerija)가 라트비아 국립미술관의 시작이라고 본다. 하지만 1905년 지금의 건물로 옮겨지면서 리가 시립 미술관(Rīgas Pilsētas mākslas muzeju)이 됐다.
1940년부터는 LPSR(Latvijas Padomju Sociālistiskā Republika,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소비에트 미술관(Padomju mākslas muzeju)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후 1964년에는 LPSR 미술관, 1987년에는 주립 미술관(Valsts mākslas muzejs)으로 불리다가, 독립 이후인 1995년에 라트비아 국립미술관으로 바뀌는 파란만장한 역사를 거쳐 왔다. 2013~2015년 사이에 복원 및 개조, 확장 공사를 시행해 공사 후 총면적은 이전의 2배인 8249㎡로 커졌다.
개관 이후로 여러 사람들로부터 개인 수집품을 모아 전시했고, 1919년부터 1940년 사이에는 주로 라트비아 화가들의 작품을 수집했다. 19세기 초반 활동한 독일계 발트 화가인 요한 하인리히 바우만(Johann Heinrich Bauman)와 요한 월터(Johann Walter)를 비롯해, 라트비아 화가로는 자니스 로젠탈(Janis Rozentāls), 레오 코클(Leo Kokle) 등의 작품들이 주목할 만하다.
입장료는 상설전시와 대전시장 전시를 합쳐 6유로였던 것 같다. 작품들은 대부분 근대 사회주의체제의 영향인 듯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가 많았다. 특히 20세기 후반 라트비아의 유명 미술가이며, 라트비아 예술아카데미의 총재를 지낸 에드가 일트너(Edgars Iltners)의 ‘나의 라트비아(Mana Latvija)’와 ‘지주들(Zemes saimnieki)’을 보면, ‘가혹한 형식’을 빌어 현대화돼가는 사회주의적 현실을 그려냈다는 평가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집합장소로 돌아갈 시간에 임박해서 미술관 2층에 있는 라트비아 사진작가 군나르 빈데(Gunārs Binde)의 연작 사진작품 ‘십자가를 가진 소녀, 사르미테 실레(Meitene ar krustiņu. Sarmīte Sīle)’를 발견했다. 라트비아TV에서 예술프로그램 편집자 겸 감독을 역임한 사르미테 실레의 모습을 18살이 되던 1963년부터 2013년까지 10년 주기로 찍은 6장의 연작 사진이다.
라트비아 사진예술의 역사에서 전설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사르비테가 2018년 타계했기 때문에 2023년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매번 가슴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자세를 취한 실레는 물론, 이런 작품을 찍은 빈데 역시 재능이 뛰어난 예술가였다는 것을 알겠다. 25분밖에 되지 않는 자유시간이지만 미술관 전체를 돌아볼 욕심으로 2개 층에 걸쳐 전시된 작품들을 누구말대로 롤러스케이트를 탄 듯 빠르게 돌아봤다.
약속된 시간, 5시50분에 맞추기 위해 얼추 관람을 마치고 미술관을 떠났다. 미술관 뒤편은 공원이다. 공원에서 발견한 석상은 라이니스(Rainis)라고 하는 라트비아의 시인이자 극작가다. 본명이 야니스 크리스야니스 플리크산스(Janis Krišjānis Pliekšāns, 1865-1929)로, 상트 페테르부르크 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하고 빌니우스와 젤가바에서 변호사로 살다 디에나스 라파(Dienas Lapa)라는 신문의 편집자로 일하면서 비밀반정부기구 활동에도 참여해 1987년부터 5년 동안 추방당했다.
추방 기간 중에는 세계 고전문학작품을 라트비아어로 번역하는 한편, 첫 번째 시집 인 ‘푸른 저녁의 먼 기분(Tālas noskaņas zilā vakarā, 1903)’을 출간했다. 1927년에 발표한 희곡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Mīla stiprāka par nāvi)’는 ‘투라이다의 장미(Turaidas Roze)’ 전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투라이다의 장미에 관한 전설은 다음날 찾아가는 투라이다 성에서 설명하겠다.
리가시청 뒤에 있는 한식당 설악산에서 육개장으로 저녁을 먹었다. 정체가 모호한 밀가루전에 호박을 넣었더라면 비 오는 풍경과 잘 어울렸을 것 같다. 그래도 약간 쉰 김치와 새콤하게 초고추장으로 버무린 오이는 맛있었다. 육개장이 김치찌개에 가까웠다는 이야기는 후문이다. 저녁을 먹고는 걸어서 강변까지 이동해 선착장에서 작은 배를 탔다. 선택관광으로 구도심을 감싸고 있는 해자를 돌아보는 운하투어를 한 것이다.
배가 작은 탓도 있지만 부다페스트의 선박사고를 의식한 듯 일행 모두 배안에 얌전하게 앉아 비닐 커튼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감상했다. 운하의 폭이 다소 넓어 보이지만 분위기는 미국의 샌안토니오에 있는 강변산책로(Paseo del Río) 분위기가 났다. 리버워크(River Walk)라고도 하는 강변산책로는 커다란 빌딩 아래를 지나기도 했다. 강변은 길을 따라 다양한 가게들이 늘어서 있어 아주 분주한 곳이기도 하다. 배로 혹은 걸어서 돌아볼 수도 있는 점이 독특했다.
도시운하(Pilsētas Kanāls)는 다우가바 강의 오른쪽 강둑에 있는 리가 구시가(Vecriga)를 감싸는 인공수로로, 길이는 3.2㎞에 달하며 최대 폭은 90m, 깊이는 2m 정도다. 도시운하를 흐르는 강의 흐름을 조절하기 위해 다우가바 강에 연결되는 운하의 양 끝에는 갑문을 달았다. 16개 다리가 운하를 가로질러 주변지역을 도심과 연결하고 있다.
리가의 구도심은 1201년 다우가바 강변에 세워진 게르만 교역소였다. 16세기 게르만의 튜턴기사단이 폴란드, 스웨덴, 러시아의 연합세력에 물러난 이후, 세 세력은 리보니아로 알려진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계속 싸웠다. 1650년 리가를 차지한 스웨덴은 러시아의 침공에 대비해 성벽 주위에 해자를 팠다.
그러나 러시아는 1701년 스웨덴군을 몰아내고 라보니아 지역을 차지하는데 성공했다. 다우가바 강이 리가 만에 열리는 왼쪽에 있는 다우가브그리바스 요새를 강화하고 폴란드 쪽으로 영토를 확장하게 된 러시아 입장에서는 리가시의 성벽이 의미가 없었다. 1857년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로 2세는 리가성벽을 철거하고 대신 해자를 도시운하로 활용하도록 했다.
1880년 독일출신 조경사 게오르그 쿠팔트(Georg Kuphaldt)가 도시운하의 재개발을 맡았다. 그는 대지의 지형을 고려해 폭포가 있는 인공 지류, 경치 좋은 다리, 그리고 잠금 장치와 다우가바 강 조수를 분리하는 굴곡 경로 등 운하의 실용적인 요소까지 고려한 설계를 완성했다. 그때 쿠팔트의 나이는 27세였다.
배는 비가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도시 운하를 천천히 지나간다. 운하 가운데 물을 뿜어 올리는 분수도 있고, 운하 아래까지 바짝 내려온 유치창문이 많은 건물은 리가 항만공사(Rīgas brīvostas pārvalde)라고 한다. 전에는 여름을 의미하는 바사라(Vasara)라는 이름의 카페가 들어있었다고 했다.
그 맞은편에는 중국식 정자가 있고, 정자에서 가까운 다리 옆에 알렉산더 세르게이비치 푸쉬킨(Александр Сергеевич Пушкин)의 동상이 있다. 지금은 네덜란드에 거주하는 조각가 알렉산더 타타리노프(Alexander Tatarinov)의 작품으로 2009년 모스크바에서 선물로 보내준 것이다.
푸쉬킨의 동상이 서있는 곳에서 가까운 대로는 지금은 크론발다(Kronvalda) 대로라고 부르지만 1920년대까지만 해도 푸쉬킨 대로라고 불렀다. 프쉬킨은 리가를 방문한 적이 없지만 1825년 염문을 뿌린 뮤즈 안나 페트로브나 케언(Анна Петровна Керн)이 살았고, 그녀의 동상이 있는 아베 솔 콘서트홀(Koncertzāle Ave Sol)이 근처에 있다.
배가 자유기념비를 지나면 오른쪽으로 라트비아 국립오페라극장이 있고, 그 맞은편으로는 라트비아 대학이 있다. 극장을 돌아가면 이내 기차역을 만드느라 복개된 구간을 지나 중앙시장이 나타나고 이내 운하의 끝에 도착한다. 7시 반에 배에서 내렸는데, 선택관광을 하지 않은 일행을 태운 버스가 오지 않아 대통령궁으로 사용하고 있는 리가성(Rīgas pils)을 구경하기로 했다.
리가 옛 시청과 리가 대성당 사이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성당 앞 작은 정원에 요한스 고트프리트 헤르더(Johann Gottfried Herder, 1744-1803)의 흉상이 있다. 종탑 아래 있는 출입구의 오른편이다. 지금은 폴란드의 모롱(Morąg)이지만 프로이센 왕국 시절에는 모룽겐(Mohrungen)에서 태어난 헤르더는 17살이 되던 해에 코니히스베르크 대학에 입학해 칸트의 학생이 됐다. 또한 철학자 요한 게오르크 하만(Johann Georg Hamann)의 지적제자가 됐다.
1764년에 성직자가 된 헤르더는 리가의 성당학교에서 가르치면서 문학비평도 했다. 1770년 스트라스부르에 갔을 때 어린 괴테를 만나 영감도 줬다. 1772년에는 언어의 기원에 관한 논문을 출판하는 등 그는 언어철학, 문화인류학, 역사철학, 정치철학 등의 영역에 관심을 보였다. 생전에 그는 “시인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창조하는 사람이다. 사람들에게 세상을 볼 수 있도록 하고, 영혼을 그 세계로 인도해간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