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의약품에 대한 고율 관세 부과를 예고하면서 국내 제약바이오업계의 긴장감이 커지고 있다. 이달 의약품 품목관세 최종안이 발표될 예정인 가운데 업계는 물량을 사전에 확보하고, 추가 공급망 확대를 검토하는 등 준비에 나섰다.
트럼프 대통령은 8일(현지시간) 의약품, 반도체에 대한 관세 부과 계획을 곧 발표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이날 백악관에서 열린 내각회의에서 취재진에 “우리는 곧 제약 산업에 대한 조치를 발표할 것”이라며 “매우 높은 관세율인 200%를 부과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예 기간을 두고 관세를 부과하겠다고도 밝혔다. 그는 “(미국으로) 들어올 시간을 1년이나 1년 반 정도 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외국 제약회사들이 미국으로 생산시설을 이전할 시간을 준 뒤 관세를 물리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5월 서명한 의약품 제조 촉진 관련 행정명령에는 제약사가 미국 내 새로운 생산시설을 건설하면 환경보호청(EPA)이 절차를 간소화하고, 식품의약국(FDA)이 불필요한 규제 등을 폐지하는 내용이 담겼다.
트럼프 대통령이 유예기간을 언급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관세 부과율 역시 지난 2월 직접 언급한 수준은 25%였다. 이번에 예고한 200%는 예상했던 범위를 훌쩍 뛰어넘는다.
의약품에 200% 관세가 매겨지면 제약업계 타격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미국은 세계 최대 의약품 시장이자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들의 최대 수출국이다. 관세청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대미(對美) 의약품 수출액은 지난 2023년 약 10억 달러(한화 약 1조4600억원)에서 지난해 15억 달러(약 2조2000억원)로 크게 늘었다. 한국의 전체 의약품 수출에서 미국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도 지난해 기준 18%에 달한다.
관세 사정권 내에 있는 국내 제약·바이오업계는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대응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뇌전증 국산 신약인 ‘세노바메이트’를 개발해 미국에서 판매 중인 SK바이오팜은 도미니카공화국 근처에 있는 미국령 푸에르토리코에 생산 거점을 마련했고, 관세 발효 즉시 생산이 가능하도록 조치를 마쳤다. SK바이오팜 관계자는 본지에 “유예기간이 부여된 만큼 최적의 공급망과 생산구조를 설계하는 데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유예를 언급한 점은 이전보다 더 긍정적 상황으로 평가하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에서 혈액제제인 ‘알리글로’를 판매 중인 GC녹십자도 우선 재고를 확보해놓은 상태다. GC녹십자 관계자는 “관세가 즉시 발효되는 것이 아니고 추후 확정 여부도 불투명해 단기 리스크는 제한적으로 보고 있다”면서 “일단 단기적으로 미국향 재고 물량을 확보해뒀다”라고 했다.
셀트리온은 9일 입장문을 통해 “미국 내 의약품 관세 정책이 어느 시점에, 어떤 규모로 결정되더라도 회사에 미치는 영향이 없도록 내년 말까지 준비를 완료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단기적으로는 2년분의 재고를 보유하고 있으며, 미국 판매 제품은 미국에서 생산할 수 있도록 현지 CMO(위탁생산) 파트너와 계약을 완료했다고 했다. 장기전략으로는 미국 생산시설 보유 회사의 인수를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이 그동안 여러 차례 관세를 경고한 뒤 입장을 번복한 바 있어, 실제 의약품에 200% 관세를 부과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견해도 있다. 미국 제약업계의 반발이 큰 점도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미국제약협회(PhRMA)도 “관세에 지출되는 모든 돈은 미국의 제조업이나 환자를 위한 미래 치료제 개발에 투자할 수 없다”며 “의약품은 전통적으로 관세 대상에서 면제돼 왔으며, 이번 정책은 미국 제조업 부흥이란 대통령의 목표에 역행하는 조치”라고 비판했다.
제약·바이오업계 관계자는 “트럼프 1기 당시에도 의약품에 관세를 부과하려다가 실패한 적이 있다. 이번에 발표한 200% 관세부과율은 비현실적 수치라 실제로 발효될지 의문”이라며 “현재는 실제 관세 부과 여부가 불투명해 업계에선 오히려 긍정적이라고 보고 있다”고 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