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사이드] 라비의 오답노트

[딥사이드] 라비의 오답노트

기사승인 2020-03-21 09:00:00

[쿠키뉴스] 이은호 기자 =“라비가 ‘놀토’의 방향성이에요.” 지난 21일 방송한 tvN ‘놀라운 토요일’ 100회 특집에서 그룹 빅스 멤버 라비의 팬을 자처하던 개그맨 유세윤은 이렇게 외쳤다. 배우들의 사진을 보고 출연작을 맞추는 코너에서, 라비가 배우 손예진의 ‘클래식’ 사진을 보고 “님아”를 외친 참이었다. “옛날 작품”이라는 힌트에 노년 부부의 사랑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떠올린, 놀라운 의식의 흐름. 곁에서 지켜보던 래퍼 넉살은 “뇌가 삐져나올 정도였다”며 감탄했다.

라비는 이날 방송의 히어로였다. 드라마 ‘미우나 고우나’를 ‘미우나 좋으나’와 ‘미우나 싫으나’로 말하거나, 캔의 노래 ‘내 생에 봄날은’의 제목을 ‘야인’ ‘부둣가’로 말한 것(이 노래는 드라마 ‘야인시대’의 주제곡과 분위기가 비슷하고, 첫 소절 가사가 ‘비린내 나는 부둣가에’다.)은 약과다. MC 붐이 드라마 ‘오자룡이 간다’의 제목을 퀴즈로 내면서 ‘○○○○ 간다’고 힌트를 주자, 라비는 자신있게 외쳤다. “상두 학교 간다!” 드라마 ‘상두야 학교 가자’에서 착안한 오답이었다. 절정은 오답을 연발하는 라비에게 혜리가 핀잔을 줄 때였다. 혜리가 “아이 멍청아”라고 말하자, 라비는 뭔가 깨달았다는 듯한 얼굴로 칠판에 “멍청아”를 받아 적었다. 그렇다. 라비는 진심이었다.

하지만 라비의 수많은 오답노트는 결국 하나의 정답을 찾기 위해 쓰인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주저 없이 던지고, 주변 사람들의 피드백을 적극적으로 흡수하는 태도는 지금의 라비를 만든 힘이다. 라비는 “첫 걸음이 엉망이라도, 일단 걸어야 두 번째 걸음도 걸을 수 있다고 생각”(‘바이어스’ 인터뷰)한다. 그가 “음악적인 완성도에 있어서 부족함이 많다고 생각”하면서도 첫 번째 믹스테이프 ‘리버스 2016’(R.EBIRTH 2016)을 낸 것 역시 이런 이유에서였다. 라비는 19세 때부터 직접 곡을 쓰기 시작해 140곡 이상의 자작곡을 저작권협회에 등록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이돌 가수 가운데는 그룹 빅뱅의 멤버 지드래곤 다음으로 많은 수다. 그는 말한다. “라비라는 가수가 200곡째에 히트하는 가수일 수도 있고, 300곡 째에 히트하는 가수일 수도 있는데…. 안 가보면 모르잖아요.”(MBC ‘라디오스타’)

물론 히트하는 노래가 정답이 되는 건 아니다. 다만 라비는 불완전한 자신을 인정하고 내보임으로써 성장의 발판을 마련해왔다. 그가 2014년 발표한 노래 ‘밤’(Bomb)은 당시 여성의 신체를 대상화·상품화한다는 비판에 직면했었다. ‘아이돌 래퍼’라는 낙인을 벗어나고 싶어하는 가수들이 으레 그렇듯, 라비 역시 여성의 신체를 전시하는 것을 래퍼의 ‘스웨그’로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라비는 이런 비판을 즉시, 그리고 겸허하게 받아들였다. “여러분께 불편함을 드릴 수 있는 부분을 인지하지 못한 제 자신을 반성한다”는 사과와 함께 문제가 된 장면을 편집했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며 성찰을 거부한 이들이 이후에도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모습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봐 왔던가.

2012년 아이돌 그룹 멤버로 데뷔해, 한 때 다른 아이돌 그룹의 래퍼에게 “시계춤 추고 있네. 음치면 연습해”라며 ‘디스’를 당하기도 했던 그는, 이제 “모두 락스타가 돼도 돼”(‘락스타’ 가사)라며 자신을 포함한 많은 이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는다. 단 하나의 정답이 존재하는 퀴즈와 달리, 음악에는 정해진 답이 없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라비가 자신이 원하는 곳을 향해 걷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것은, 설령 엉망일 지라도 첫 걸음을 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첫 믹스테이프의 수록곡 ‘웨어 엠 아이’(Where am i)의 가사처럼 그는 “누군가의 자랑이자 누군가의 병신”일 것이다. 그래도 그게 무슨 상관인가. 유세윤의 말처럼 라비가 곧 방향성인데.

wild37@kukinews.com

이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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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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