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한성주 기자 = ‘n번방’ 사건 이후 각 정당이 디지털 성범죄 근절 공약을 내놓고 있는 가운데, 총선을 앞둔 일회성 언론 플레이가 아니냐는 지적이다.
더불어민주당·미래통합당·정의당·국민의당 등은 최근 앞다퉈 디지털 성범죄 대책을 내놨다. 이런 분위기는 n번방 사건이 공분을 사면서 디지털 성범죄 관련 정책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커진 것과 무관치 않다. 참고로 n번방 사건이란, 조주빈을 비롯해 닉네임 ‘갓갓’, ‘와치맨’ 등을 사용한 가해자들이 익명 메신저 텔레그램을 이용해 피해 여성들을 협박·성착취를 한 성범죄 사건이다.
그동안 불법 영상물 제작·유포·소비를 차단 및 처벌해야 한다는 요구가 높았다. 가해자 처벌과 피해자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는 요청도 어제, 오늘의 요구가 아니었다. 앞선 정당들의 총선 공약집에는 이러한 요구가 일부 반영되어 있긴 하다.
우선 민주당 공약집에는 ‘디지털 성범죄 근절 대책 추진’ 항목이 포함돼 있다. 디지털 성범죄 예방·처벌 관련 공약으로는 ▲변형카메라 유통·소지 관리 강화 ▲성착취 영상물 구매자·소지자 처벌 ▲유포협박·영상합성 처벌 등이 제시됐다. 피해자 지원 공약은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 운영을 강화 ▲불법 영상물 삭제 지원에 AI기술 도입 등이 있다.
통합당은 디지털 성범죄 관련 항목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진 않다. 다만, ‘여성범죄 안전망 확충’ 항목 속에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공약이 2개 있다. 각 공약을 보면 ▲‘변형카메라의 관리에 관한 법률안’을 통한 변형카메라 관리제 도입 ▲영상물 유포 협박도 성폭력으로 간주, 협박 피해자 또한 성폭력 피해자와 동일 지원 등이다.
국민의당은 디지털 성범죄 대책을 ‘여성안전 정책’과 ‘아동·청소년안전 정책’ 두 항목에서 모두 다뤘다. 각각 항목에서 ‘디지털 성범죄 처벌 강화’, ‘한국형 스위티프로젝트 추진’ 등 소항목을 마련했다. 예방·처벌 관련 공약의 골자는 ▲디지털 성범죄 전담부서를 통한 해외 공조 추진 ▲불법 영상물 제작·유포·소비자 처벌 ▲피해자가 특정되는 불법 영상물·재범 가중처벌 ▲영상물 유통 플랫폼 사업자 법적 책임 강화 등이다. 피해자 지원 공약은 ▲피해 영상물 자동삭제 AI기술 개발 ▲방송통신위원회의 불법 영상물 신속 삭제·차단 등이다.
디지털 성범죄와 관련해 앞선 정당 중 가장 많은 공약을 내놓은 당은 정의당이다. ‘텔레그램 n번방 디지털성폭력, 다양한 폭력 유형 대응을 강화 하겠습니다’ 항목 하에 아동·청소년에 대한 디지털 성범죄 대책도 별도로 제시했다. 예방·처벌 관련 공약으로는 ▲불법 영상물 공급망 단속 강화·범죄수익 몰수 ▲성폭력특별법 개정으로 처벌 규정·형량 강화 ▲‘부다페스트 사이버범죄 협약’ 체결로 국제 공조 ▲UN아동권리협약에 준해 아동성착취 영상 소지자 처벌 ▲채팅앱 관련 성매매방지법 개정 ▲채팅앱 설치·실행 시 청소년 이용자 인증 강화 ▲청소년·공무원 대상 디지털성범죄 예방·교육 강화 등이다. 피해 지원으로는 ▲디지털성범죄 피해자 신고·상담·사후관리 지원 종합서비스를 제시했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은 정치권이 디지털 성범죄 문제 해결을 위한 비전을 확립하고, 공약을 구체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현재 각 정당들은 단순히 좋은 정책을 나열하는 데 그치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은 국내 35개 여성시민단체가 구성한 연합체다.
연합은 공약분석자료를 발표하면서 “가해자에 대한 처벌 강화도 중요하지만, 범죄 근절을 위해 시급한 것은 불법 영상물 유통 체계에 대한 규제·단속”이라고 전했다. 이어 “더불어민주당의 경우, 불법 영상물 유통 단속과 플랫폼 사업자의 책무 강화 관련 공약이 없다”며 “정의당은 유통구조 문제를 해결하려는 공약은 있지만, 이미 있는 제도를 공약으로 언급하고 있어 생색내기용 정책나열에 그치지 않을지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이어 “국민의당과 민주당이 제시한 AI기술은 이미 유포 피해가 발생한 이후 삭제를 지원하는 수단일 뿐, 디지털 성범죄를 사전에 예방할 수 없다”며 실질적인 범죄 종식 전략이 아니라고 분석했다. 이어 “미래통합당이 디지털 성범죄의 심각성에 별로 주목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이 정당의 빈약한 공약이 방증한다”고 비판했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도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정치권의 낮은 이해도를 지적했다. 승진 사무국장은 “유포·판매 등 적극적 행위에 대한 규제와 처벌 공약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사이버 성범죄의 시작과 완성은 ‘소비와 시청’이다”라고 꼬집었다. 이어 “포털 및 플랫폼에 대해 정당들은 ‘협조 요청’을 강화하겠다고 약속하지만, 협조 요청만으로는 포털을 통한 2차 피해를 해결할 수 없다”며 “강제력 있는 삭제 지시 수단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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