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지난 6일 프랑스 경제지 <레제코>에 한국의 코로나19 방역대책을 비난하는 칼럼이 실렸습니다. 기고문을 쓴 비르지니 프라델 변호사는 “한국이 추적 장치까지 마련한 건 불행한 결과”라거나 “한국은 개인의 자유에 있어 본보기가 되는 나라가 아니다”, “한국은 감시 고발에 있어 세계 둘째가는 나라” 등의 주장을 펴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이에 쿠키뉴스는 송기호 변호사의 반박 기고문을 게재합니다.
코로나19 비상사태 속에서 한국은 자신의 위치를 발견하는 중이다. 미국과 중국은 경쟁하듯이 코로나 극복에서 실패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끊임없이 ‘중국 바이러스’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세계 보건기구(WHO) 분담금을 끊겠다고 압박하면서 세계 리더십을 스스로 허물고 있다.
나는 1985년에 영국에서 시작한 광우병을 ‘영국 광우병’이라고 부른 것을 보지 못했다. 보편적 공공 건강보험을 제공하지 못한 미국 모델의 취약성이 온 세계에 드러났다. 이제 미국은 코로나 비상 전염의 새로운 진앙지로 전락했다. 코로나로 사망한 시신을 공동묘지에 묻고 있다. 중국도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여 참담한 대가를 치렀다. 고인이 된 우한의 의사 이원량은 작년 겨울에 새로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의 징후를 알아차리고 중국 인민을 위해 경고하였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건 억압뿐이었다. 그는 환자를 진료하다가 본인이 감염되어 사망했다. 중국 정부에게 더 먼저 필요했던 것은 우한 봉쇄가 아니라 표현의 자유였다.
한국은 ‘개방적 사회 연대’의 신문명을 실험 중이다. 국경이나 도시 봉쇄 그리고 외출금지명령 없이 코로나를 일정 수준으로 통제하였다. 한국 모델을 작동시킨 힘은 한국의 민주주의와 사회 연대 역량에 있다. 한국의 혁신 중견기업들이 신속하게 진단약품을 개발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국민건강보험이 있다. 그 뒤에는 의료민영화를 반대하는 시민들의 끈질긴 투쟁이 있다.
한국이 독일과 프랑스와 달리 공적 공간에서 마스크 쓰기를 통해 확산 방지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사회적 연대의 저력이다. 대중의 참여와 약사들의 헌신적 연대가 마스크 5부제를 정착시켰다. 한국의 사회적 연대는 동학혁명과 농지개혁 그리고 1980년 광주항쟁을 거쳐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 이르는 오랜 한국 민중의 성취이다. 투명하고 개방적인 정보제공은 국민적 요구였다. 여기에 한국의 과학기술이 결합하였다. 개방적 사회연대는 코로나나 기후 변화 등의 세계적 재앙에 대처하는 신문명의 싹이 될 수 있다.
프랑스 변호사인 비르지니 프라델은 한국 모델을 추적과 감시 체계라고 규정하고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려면 이를 따르면 안 된다고 비판하였다. 그의 주장에 대해 프랑스는 외출금지명령을 내리지 않았냐고 비꼴 필요는 없다. 한국의 파파라치 문화를 과장했다고 따질 필요도 없다. 우리를 잘 알아야 할 의무는 우리에게 있지 외부의 타인에 있지 않다. 이스라엘 역사학자인 유발 하라리도 중국의 코로나 감시체제의 문제를 지적하였다.
그가 말한 개인의 자유는 누구에게나 중요하다. 한국의 개방적 사회연대 전통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광주항쟁시기 시민군에게 주먹밥을 해 준 광주 대인동의 성노동자들에게 광주 시민 그 누구도 이들을 비하하거나 배제하지 않았다. 오히려 프랑스 변호사의 비판에서 성찰해야 할 것은 우리 모델의 회복력이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가 낳은 양극화와 기업 권력이 사회연대를 갉아먹지 않도록 경계할 일이다. 그리고 1953년의 판문점 정전 체제를 해체하여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전면적으로 보장할 일이다. 개방적 사회 연대의 신문명을 추구하는 시민의 몫이다.
송기호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