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열린 결말 [TV봤더니]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열린 결말 [TV봤더니]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열린 결말 [TV봤더니]

기사승인 2020-04-16 07:00:00


[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 “내가 그 다섯 명을 한꺼번에 정리해줄게. 잘 들어” tvN ‘슬기로운 의사생활’ 4회에서 응급의학과 봉광현 교수(최영준)는 ‘99즈’라 불리는 자신의 동기들을 궁금해 하는 전공의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는 이들을 다섯 가지가 없는 ‘5무’(無)로 설명할 수 있다며, 각 인물들의 특징을 요약하고 오랜 시간 같이 보낸 동기만 알 수 있는 TMI(Too Much Information)를 세세하게 전달한다. 이후 ‘봉샘 살롱’이라 이름 붙여진 이 모임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새 멤버가 합류할 정도로 열기를 띤다. 이성적인 관심, 업무적 필요성 등 ‘99즈’의 비화를 듣고 싶어 하는 이유도 각지각색이다. 전공의들은 바쁜 와중에도 휴대전화를 무시해가면서까지 봉 교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고개를 끄덕인다.

제작진은 인물들에 대해 해야 할 말이 많은 것처럼 보인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봉샘 살롱’ 외에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99학번 동기인 다섯 주인공들의 과거를 소환한다. 마치 도원결의 같은 ‘99즈’의 첫 만남 장면을 빛바랜 플래시백으로 직접 보여주는가 하면, 식사 도중 나누는 대화로 힌트를 준다. 매회 한 명씩 개인의 사연을 한 편의 드라마로 소개하기도 한다.

매회 전개하는 방식도 비슷하다. 맥락을 알 수 없는 인물들의 행동이나 말을 먼저 보여준다. 그것들은 해당 회차에서 해소되거나 나중을 위한 복선이 된다. 불친절한 내용과 친절한 내용을 짧은 간격으로 빠르게 반복하면서 이야기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미처 해결되지 못한 내용은 시청자들의 추리게임을 위한 숙제로 남겨진다. 제작진은 이미 완성해놓은 인물 정보를 하나씩 흘리면서 궁금증을 유발한다. 컴백을 앞둔 아이돌 그룹의 기획사가 새 앨범과 콘셉트에 대한 정보를 ‘티저’ 형식으로 매일 하나씩 공개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이다.


모두 언젠가 본 듯한 패턴이다. 사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서울대 의예과 동기 다섯 명을 주인공으로 하는 ‘응답하라 1999’나 마찬가지다. 가족이나 다름없이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낸 친구들과 그 안에서 엇갈리는 사랑, 타고난 천재 캐릭터, 특유의 가족주의,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설정 등은 신원호 PD-이우정 작가가 이미 반복해온 익숙한 코드다. 매 작품 새겨 넣는 야구에 대한 애정은 율제병원 전공의들에게 야구선수들의 이름을 붙여주며 해결했다. 1990년대 발표된 명곡들로 채워진 OST에 이르면 제작진 역시 그 사실을 숨길 생각이 없어 보인다.

‘응답하라’ 타이틀 대신 ‘슬기로운 의사생활’로 제목을 정할 수 있었던 건 현재 시점의 차이 덕분이다. ‘응답하라’ 시리즈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보내는 누군가의 ‘미래’를 먼저 보여주고 그들이 보낸 80~90년대 시절을 ‘현재’로 삼는다. 시청자들이 ‘과거’라고 부르는 곳은 드라마 속에서 ‘현재’가 되고, 시청자들이 ‘현재’라고 부르는 드라마 속 ‘미래’를 향해 진행된다. 반대로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현재’에서 ‘과거’를 본다. 주인공들의 로맨스가 완성되기 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응답하라’ 시리즈의 결말 직전 시점을 그리고 있다.

언뜻 같은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전달방식의 차이는 크다. 현재 시점을 보여주는 데 집중하면서 예언자처럼 미래 시점을 보여줬던 ‘응답하라’ 시리즈와 달리,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현재 시점에서 과거 이야기를 전달할 누군가의 말이 꼭 필요하다. 봉샘 살롱을 비롯해 인물들의 주변 사람들이 그 역할을 수행한다. 문제는 들려주는 사람이 있으면, 듣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려면 듣는 사람이 먼저 물어볼 정도로 궁금해 할 이유가 필요하고, 그들 간의 관계도 존재해야 한다. 주인공 한 명을 위해 수많은 연기자와 대본이 필요했던 영화 ‘트루먼 쇼’와 비슷한 구조다. 그 결과는? 40대 어른들이 20~30대에게 ‘나 때는 어땠는지’ 들려주는 ‘라떼’ 서사의 탄생이다.

‘응답하라’ 시리즈는 동창회나 결혼식 장면으로 시작해 남편 찾기에 나섰고, ‘슬기로운 감빵생활’은 출소 날짜가 고정된 주인공의 고군분투기를 다뤘다. 정해진 미래를 향해 달려간 전작들과 달리,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처음 열린 결말을 향해 나아간다. 처음부터 보여줬던 미래 시점은 사라졌고, 어느 시점에 마무리될지도 알려주지 않는다. 제작진은 이미 첫 방송 전부터 시즌제 제작과 방영 시기까지 공언했다. 드라마가 성공할 거란 무조건적인 확신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즐겨 쓰던 시점을 바꾸고 결말을 열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던 여성 캐릭터는 도움이 필요 없는 완벽한 여성 캐릭터로 바뀌었다. 전작에 출연했던 배우들이 다시 합류했다. 짝사랑과 가족애 등 실패를 모르는 필살기들을 집약시켰다. 하지만 이야기와 전개방식은 예전 그대로다. 결말의 방향을 예측하는 재미 대신 지속가능한 재미를 부여할 방법은 찾지 못했다. 결국 아이돌 같은 의사 오남매가 얼마나 매력적이고 착하고 천재적인지 자랑하고, 필사적으로 짝을 맺어주려는 누군가의 시선이 드리워져 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결말은 대체 어디를 향해 열려있는 걸까.

bluebell@kukinews.com / 사진=tvN 제공

이준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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