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발트, 서른일곱 번째 이야기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발트, 서른일곱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20-04-29 01:10:16

우리 일행은 시청약국까지 돌아본 다음 시청 건너편 골목길 초입에 있는 리보니아 기념품점(Livonia suveniirid)으로 가서 린넨, 호박 등 에스토니아 특산 기념품 등을 구경하다가 자유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필자는 아내와 함께 성 니콜라스 교회(Niguliste kirik)를 돌아봤다. 교회는 스웨덴의 고틀란드(Gotland)에서 온 베스트팔렌(Westfalen) 상인들에 의해 1230~1275년 사이에 세워져 어부와 선원의 후원자인 니콜라스 성인에게 헌정된 교회이다.

처음에는 지금의 합창단 자리에 포함되는 작은 4면의 작은 합창단 자리 규모의 교회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13세기 말에는 4개의 아치로 구성된 장방형 건물을 추가했는데, 지금의 교회 규모인 26.4×31.7m에 가까운 크기였다. 북쪽 벽에는 화려한 파일로 장식된 아치형의 입구가 있었다. 남쪽 벽에 2층으로 된 입구가 있었는데 15세기에 무너진 것을 1960년에 복원했다. 

1405~1420년 사이에 측면 통로 위에 중앙통로의 채광창을 만들면서 바실리카 양식이라고 하는 현재의 구조를 갖췄다. 1515년에는 탑을 더 높이면서 후기 고딕양식의 첨탑을 얹었다. 17세기 말에 탑을 강화하면서 갤러리가 있는 바로크 양식의 첨탑으로 대체했다. 탑의 높이는 105m다.

성 니콜라스 교회는 1523~1524년 사이에 일어난 종교개혁 과정에서 피해를 입지 않은 탈린 유일의 교회였다. 회중의 우두머리가 교회의 자물쇠에 녹은 납을 쏟아 부었기 때문에 성난 개신교도들이 교회 안으로 난입할 수 없었다. 교회는 16세기에 루터교로 개종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이던 1944년 3월 9일, 탈린에 퍼부은 소련의 공습으로 일어난 화재로 교회는 폐허가 됐다. 다만 교회 안에 있던 귀중한 예술품들은 미리 대피시켰기 때문에 피해를 입지 않았다. 

1953~1981년 사이에 복원작업이 이뤄졌다. 1982년 10월 12일에 화재로 탑이 불타고, 본당지붕과 세인트 안토니 예배당이 손상됐으며, 복원을 거쳐 1984년부터는 에스토니아 미술관의 중세 예술품 컬렉션을 전시하는 박물관 및 콘서트홀로 사용되고 있다.

박물관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 작품은 안토니우스 예배당에 걸려있는 뤼벡(Lübeck)의 화가 베른트 노케(Bernt Notke)의 ‘죽음의 춤(Danse Macabre)’이다. 힘센 자를 화려하게 표현했을 뿐 아니라 허약한 자를 뼈만 앙상한 죽음으로 묘사함으로써 삶의 덧없음을 표현했다. 15세기 말에 완성된 최초의 30m 폭의 그림 가운데 일부만이 남아 전시되고 있다. 

성 니콜라스 교회의 주제단은 뤼벡(Lübeck)의 화가 허먼 로드(Hermen Rode)가 1478~1148년 사이에 제작한 것으로, 15세기 한자동맹 영역이던 북부독일의 교회 가운데 가장 큰 제단이다. 

제단 양 날개의 바깥쪽에는 니콜라스 성인과 빅터 성인의 생애를 묘사했고, 중앙 부분과 펼쳐진 날개에는 성인들의 형상을 나무에 새긴 30개의 부조를 붙였다. 바깥 날개에는 탈린의 대길드와 검은머리 형제단의 상징을 보여준다.

그밖에도 1500년 브뤼헤의 익명의 화가가 제작한 ‘성모 마리아와 블랙 헤드 형제단’ 제단, 브뤼셀의 얀 보먼(Jan Borman)이 1490년경에 제작한 ‘성 가족’ 제단, 16세기 초 브루게 (Brugge)의 화가 아드리안 이센브란트(Adrian Isenbrandt)가 검은머리형제단의 주문에 따라 제작한 ‘그리스도의 열정’제단 등이 있다. 교회의 중앙통로에 있는 4m 높이의 황동촛대는 7개의 가지를 가지고 있는데, 유럽에서 가장 큰 황동촛대 가운데 하나다.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있는 교회의 서쪽 끝에서 거리로 내려가려면 탈린 성의 성문 가운데 하나인 넬라시르마(Nõelasilma, ‘바늘 눈’이라는 뜻) 문을 지나야 한다. 성문을 나와 시청광장 쪽으로 가려다보면 교회로 올라가는 다른 계단 옆에 에두아르드 빌데(Eduard Vilde, 1865년 3월 4일~1933년 12월 26일)의 기념비가 서 있다. 

그는 에스토니아 작가이자 에스토니아 문학의 비판적 사실주의를 개척한 작가였다. 1919년 에스토니아공화국이 독립하면서 베를린 주재 대사를 지냈다.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우리나라에 소개된 작품은 없고, ‘메큘라의 우유배달부(Méeküla piimamees, 1916)’라는 작품이 영어로 번역돼 ‘장원의 젖 짜는 남자(Milkman of the Manor, 1976)’라는 제목으로 소개됐다.

비도 오고, 약속시간에 여유가 있어 성당 아래 있는 커다란 서점에 들어갔다. 라마투드(Raamatud)라는 이름의 서점은 중고 책을 파는 곳이었다. 대부분 에스토니아어로 돼있어 무슨 내용을 다루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다 눈에 띤 에코의 ‘미의 역사’가 반가웠지만, 내용은 역시 에스토니아어로 돼있었다. 

중세 관련 미학서적이 반가웠다. “아름다움이란 절대 완전하고 변경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시기와 장소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가질 수 있다(‘미의 역사’, 14쪽)”라고 한 에코는 이 책에서 고대 그리스로부터 중세, 르네상스시대를 거쳐 근대와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미에 대한 개념의 변화를 정리했다.

7시에 약속장소에 모여 저녁을 먹으러 갔다. 식당은 탈린의 남쪽에 있어 비가 내리는 가운데 버스로도 20분 이상 달려가야 했다. 한적한 곳에 있는 호텔의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는 8시 20분에 숙소를 향해 출발했다. 숙소인 탈린 빔시 스파(Tallinn Viimsi SPA)는 탈린시를 벗어나 북쪽에 있는 빔시지구에 있었다.

 9시가 넘어 숙소에 도착했다. 여행사 상품으로 여행할 때 겪는 불편함 가운데 하나다. 숙소 근처에서 식사를 했더라면 쉴 수 있는 시간을 더 가질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다음날은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라서 귀국 준비를 하다 보니 12시가 넘어서 잠자리에 들었다.

발트여행 8일째다. 전날 늦게 잠들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4시 반에 잠에서 깼다. 전날의 여정을 정리한 뒤 출발 준비를 했다. 7시 반에 식당으로 내러가면서 창문을 열었더니 구름이 조금 떠있지만 화창한 날씨다. 하지만 길바닥이 젖어있는 것을 보면 밤에 비가 내렸던 모양이다. 

전에 탈린 시내를 조금 더 구경하는 일정이다. 아침을 먹고 9시 반에 숙소를 나서 처음 향한 곳은 어제 구경한 톰페아 아래 있는 구시가지다. 먼저 1862년에 스웨덴 요새 지역에 조성됐다가 1939년에 이름을 바꾼 린다메(Lindamäe) 공원을 돌아봤다. 

린다메 공원에는 에스토니아 건국 영웅 칼렙의 아내 린다의 청동상이 있다. 에스토니아의 의사이자 작가 프리드리히 라인홀트 크로이츠발트(Friedrich Reinhold Kreutzwald)의 대표작인 장편 서사시 ‘칼레비포엑(Kalevipoeg)’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원뿔 모양의 바위 위에 슬픔에 눈물을 짓는 린다의 청동상을 앉혔다. 칼렙의 죽음으로 슬픔에 빠진 린다의 모습을 이렇게 노래한다. 

“린다는 울었네, 처량한 미망인 / 그리움에 사무쳐 비통한 눈물 / 비탄에 잠겨 뜨거운 눈물 / 신음했네, 비석에 앉아 탄식하며 / 머물렀네, 오랫동안 괴로워 울면서.”

‘칼레비포엑’에 따르면 에스토니아 건국의 영웅 칼렙이 죽자, 그의 아내 린다는 남편의 무덤을 표시해두기 위해 커다란 바위를 산 위로 옮겨갔다. 하지만 탈린의 바닷가에 이르렀을 때 바위가 갑자기 무거워지는 바람에 떨구고 말았는데, 그 바위가 바로 톰페아가 됐다. 

린다는 슬픔에 빠져 눈물을 흘렸고, 그렇게 흘러내린 눈물이 고여 탈린 남쪽에 있는 울레미스테 호수(Ülemiste järv)가 됐다는 것이다. 린다 기념비는 에스토니아 민족 조각의 창시자 아우구스트 루디비그 와이젠버그(August Ludwig Weizenberg)가 1880년에 제작한 대리석 린다상을 바탕으로 1920년 청동으로 주조했다.

린다 기념비 아래에는 화강암 석판이 놓여 있다. “Ikka mõtlen neile, kes siit viidi... Taeva poole karjub nende äng(끌려간 사람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의 비명이 여전히 하늘에 울려 퍼지는 듯합니다)”라고 석판에 새긴 글은 에스토니아 여류시인 마리 언더(Marie Under)의 시 ‘욜루데리비투스(Jõulutervitus, 1941)’의 한 구절이다. 

‘욜루데리비투스’는 ‘메리크리스마스’처럼 쓰이는 에스토니아어 성탄절인사다. 1941년 성탄절 무렵 마리 운터는 그해 6월 14일에 에스토니아 각지의 철도역에서 가축을 싣던 화차에 실려 시베리아의 강제수용소로 끌려간 1만명이 넘는 에스토니아 사람들을 생각하며 시를 썼다.

소위 6월 추방이라고 하는 그 비극적 조치의 희생자 가운데 절반은 16세 미만이었고, 어린이도 2500명이나 됐다. 기아와 질병으로 이들 대부분은 사망했다. 비극은 에스토니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소련이 지배하던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벨로루시, 우크라이나, 몰도바 등에서 모두 6만여 명이 끌려갔다. 

추방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1949년 3월 25일부터 29일에 걸쳐 에스토니아에서 2만2500명, 라트비아에서 3만9000명, 리투아니아에서 2만5500명 등이 역시 시베리아로 끌려갔다. 프리보이(Priboi) 작전이라고 부른 이 사건은 1944년 소련이 추진한 토지개혁 등 농촌사회 개편 움직임에 대하여 무장저항운동 때문에 저질러졌다. 에스토니아 국민들의 투쟁에 대한 국제사회의 무관심에 힘입어 소련은 주민추방이라는 극단적 처방으로 저항세력을 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에스토니아 사람들은 1년에 2번 린다의 기념비에 모여 시베리아로 추방된 사람들을 위한 추모행사를 거행한다. 3월 추방기념일인 3월 25일, 6월 추방기념일인 6월 14일이다. 기념식은 에스토니아 메멘토 연합(Estonian Memento Union)이 주관한다. 보통 기념식은 오후 4시에 시작되며 에스토니아 전역에서 종을 울려 식이 시작됨을 알린다. 기념식에는 에스토니아 정부와 의회 관계자, 외교단, 탈린시 정부의 관계자들이 참석하며 시민단체가 촛불을 밝힌다. 

린다 기념비에서 도로 건너편에는 톰페아 성과 성벽에 세운 키 큰 헤르만(Pikk Hermann) 탑이다. 탑은 1360~1370년 사이에 처음 세웠으며, 16세기에 재건됐다. 탑의 높이는 45.6m인데 10층으로 된 탑에는 모두 215개의 계단을 통해 탑 꼭대기에 있는 전망대로 올라갈 수 있다. 

해발 95m 높이의 꼭대기에는 191×300cm 크기의 국기가 계양된다. 일출 시간에 국가가 연주되는 가운데 게양되고, 일몰 시간에는 에스토니아의 여류시인 루스티아 코이둘라(Lustia Koidula)의 시에 작곡가 구스타프 에르네사크(Gustav Ernesaks)가 곡을 붙인 ‘나의 조국은 나의 사랑(Mu isamaa on minu arm)’이 연주되는 가운데 기를 내린다. 

“나의 조국은 나의 사랑입니다. / 내가 내 마음을 준 사람. / 나는 너에게 가장 큰 행복을 노래한다. / 내 꽃이 만발한 에스토니아!(Mu isamaa on minu arm, / Kel südant annud ma. / Sull 'laulan ma, mu ülem õnn, / Mu õitsev Eestimaa!)”으로 시작되는 노랫말에서 조국에 대한 시인의 절절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20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오준엽 기자
oz@kukinews.com
오준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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