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이소연 기자 =과거 성폭력 사건과 관련 기울어진 판결에 고통받은 여성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56년 만의 ‘미투(ME TOO·나도 고발한다)’다.
한국여성의전화는 오는 6일 부산지법 앞에서 ‘56년 만의 미투, 재심으로 정의를’ 기자회견을 연다. 단체에 따르면 지난 1964년 5월6일 여성 A씨는 자신을 강간하려는 남성 노모씨에게 저항하다 노씨의 혀에 상해를 입혔다. 이후 노씨는 A씨에게 결혼을 요구하며 협박했다. A씨의 집에 침입해 흉기로 위협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검찰은 A씨가 노씨에게 상해를 입혔다는 이유로 ‘피의자’로 판단, A씨를 구속했다. A씨는 검사에게 모욕적인 말을 들으며 노씨와 결혼할 것을 종용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부산지법은 중상해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이 내려졌다. A씨의 저항은 정당방위로 인정되지 않았다. 당시 재판부는 “아무리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하더라도 상대방의 혀를 끊어 불구의 몸이 되게 한 것은 ‘법이 허용하는 방위의 범위’를 넘어섰다”고 판결했다. 노씨에게는 특수주거침입과 특수협박 혐의만 적용,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다.
고통의 시간을 겪은 A씨는 지난 2018년 부산 한국여성의전화 상담실을 찾아 억울함을 풀고 싶다고 털어놨다. 당시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의 성추행 의혹과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성폭력 사건이 도화선이 돼 곳곳에서 미투운동이 불붙었다. 단체는 “피해자는 미투운동을 보며 5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여성이 성폭력 피해를 경험하는 현실에 분노했다”고 전했다.
A씨의 사례처럼 과거 성폭력 관련 법조계의 인식은 ‘기울어진 운동장’을 연상케 한다. 지난 89년 검찰은 피해자에게 강간치상혐의로 구속된 가해자와 결혼하도록 설득했다. 당시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검사는 “대학원을 졸업한 가해자가 2년 정도의 실형을 살게 되는 등 인생을 망칠 수 있다”고 피해자에게 말해 고소를 취하하게 했다. 이후 두 사람이 혼인신고를 마치자 가해자는 기소유예로 석방됐다.
지난 76년 외삼촌으로부터 강간을 당해 임신한 여성이 언론 투고를 통해 해결방안을 물었다. 이에 당시 가정법원 조정위원이자 한 법대의 교수는 의사와 상의를 권하며 “외삼촌과 같은 가까운 사람과는 절대로 혼인할 수 없다”고 조언했다. 이와 함께 바로 병원을 찾지 않은 피해자의 ‘성지식’을 원망했다.
변화는 있었다. 89년 대구고법은 성추행범의 혀를 자른 여성의 정당방위를 인정, 1심의 판결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어두운 밤길을 혼자 가다 남자 2명에게 잡혀 폭행을 당하고 강제키스를 당하면서 혀를 깨문 것은 성적순결과 신체 안전을 지키기 위한 정당방위”라고 판시했다. 같은 해, 대법원에서도 여성의 행위를 정당방위로 인정했다.
다만 성폭력 상황에서 여성의 정당방위는 사안마다 다르게 평가됐다. 대법원 판례와 달리 지난 2017년 인천지법에서는 함께 술을 마시던 남자가 강제로 입맞춤하려고 하자 남성의 혀를 깨물어 절단되는 상해를 입힌 여성에게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전문가들은 성폭력 사건과 관련 법원의 판단이 과거와는 달라져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윤덕경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과거에는 성범죄를 대하는 성인지적 관점이 없었다. 여성 피해자의 불리한 사정을 고려하지 않았다”며 “최근 법원은 그나마 달라지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승재현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과거 성범죄 관련 판례에서 피해 여성에게는 귀책사유를 묻고 가해 남성에게는 음주, ‘순간적인 욕정’ 등을 이유로 죄를 경감해주는 경향이 있었다”며 “A씨 사건의 경우, 재심이 가능하다면 지금 기준으로 봤을 때 정당방위로 인정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과거의 판례들이 현재의 사법정의 및 성인지감수성과 맞지 않을 수 있다”며 “대한민국은 변화하고 있다. 법원이나 검찰에서 현재 기준에 맞는 판결을 내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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