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화의 티타임에 초대] 이상동몽(異床同夢)

[이정화의 티타임에 초대] 이상동몽(異床同夢)

기사승인 2020-06-02 16:15:49

한때, 남편이 붙여준 나의 이름은 ‘양지부인’이었다. 나는 따뜻한 햇볕이 감싸는 듯한 그 이름이 좋았지만, 그때 그가 나를 부르는 이름이 또 하나 있었으니 그건 단순히 낭만적인 애칭만은 아니었다. 어느 해 생일, 조용한 식당에서 남편이 선물상자를 주곤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나는 영화처럼 상자 속에서 들려오는 벨소리에 서둘러 포장을 풀었다. 남편의 선물은 내가 갖게 된 첫 음성인식 휴대폰이었다. 남편이 설정을 확인하라며 그 전화에 대고 ‘베짱이! 베짱이!’를 외쳤다. 베짱이는 남편이 임시로 붙여놓은 새 휴대폰의 비번이었다. 그것은 남편의 양지부인인 나의 정체성, 모두가 일할 때 놀기만 한다고 붙은 이름이었다.

그 시절, 삼십대 중반의 남편은 누구보다도 바빴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란 한 자서전 제목이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던 때라, 아버지도 남편 얼굴만 보면 우리 사위는 세상에서 제일 일이 많은 것 같다고 칭찬과 걱정을 아울러 하셨다. 그런 남편이라고 쉬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을 테니, 남편 보기에 자신이 음지에 산다면 나는 양지에 살고, 자기가 개미라면 나는 베짱이로 보여 남편은 나를 부러워했다. 그러나 나는 나대로, 남편은 넓은 세상을 활개치고 돌아다니며 대놓고 일을 하는데, 나는 내 스스로의 목표도 없이 티도 나지 않는 집안일에만 파묻혀 사는 것이 억울해 그가 부러웠다. 우리 부부의 동상이몽은 그 무렵부터였다. 

사실 남편은 처음부터 나와 달랐다. 남편과 알게 됐을 때, 우리는 둘 다 커피를 좋아하고 둘 다 앤 마가렛의 노래를 좋아해서 ‘세상에 이렇게 같을 수가!’ 놀라며 만났다. 그러나 같은 건 딱 거기까지였다. 우리는 성격도 습성도 모든 게 달랐다. 남편의 어릴 때 꿈은 대통령이었고, 나의 어릴 때 꿈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꿈과 이상이 크고 성실한 남편이 아마도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최대치의 목표를 생각할 때, 나는 게을러선지 겉멋이 들어선 지 되고 싶던 많은 꿈을 숨기고 지레 평범한 사람이 되겠노라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나는 달리 노력하지 않고도 꿈을 이루었지만 서글펐고, 남편은 대통령 꿈을 일찌감치 버리고도 평생 새로운 가장의 꿈을 꾸느라 무거웠다.

가끔 생각해본다. 꿈에도 나이가 있을까, 사람은 언제까지 꿈을 꾸며 살까, 대부분의 어른들에게 아직도 꿈이란 것이 있을까. 나는 그렇게 사람들의 삼십 대 사십 대 그 이후의 꿈들을 그려 보다 돌연 섬뜩해진다. 나에게 꿈은 문밖에 있는 거 같아 차마 나는 꿈도 못 꾼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동안, 여전히 자신의 몫을 이루었다고 생각했던 다른 사람들의 꿈이 이제야 달리 읽혀서…. 어쩌면 누구나 조금은 자기를 속이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오래오래 ‘가족 이름’을 가슴속에 적고 그것을 ‘나’라고 읽으며 살았던 나와, 그저 무거운 ‘책임’일 뿐인 것을 ‘꿈‘인 듯 자신을 부추기며 살았을 그의 동상이몽은 어쩌면 모두의 처지만 다른 같은 꿈, 이상동몽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게는 유난히 예쁘고 살뜰한 친구가 있다. 친구 남편도 정말 멋져 나의 엄지를 치켜세우게 만들지만, 나는 친구 남편에게 앞으로 열 번만 다시 태어나 다른 아내랑 살아보시라는 농담을 한다. 못생기거나 게으르거나 성질이 나쁜 아내를 골고루 만나봐야 내 친구의 진가를 새록새록 느끼고 지금의 행복을 더 만끽하실 것 같아서다. 그처럼 오늘은 내 남편에게 마음 깊이 덕담을 했다. 앞으로 꼭 두 번만 다시 태어나 다르게 살아보라고. 한 번은, 나와는 달리 남편을 끔찍이 위하며 개미처럼 부지런한 아내와 살고, 또 한 번은 멋진 남편을 만나 세상에 둘도 없는 진정한 베짱이에 양지부인으로 살라고. 그래도 역시 끝 모를 세상을 몇 번씩 산다는 건 참으로 힘겨운 일이니 더 태어나진 말고 딱 거기까지만…. 그러나 그때까지 꿈에 바란다. 나와 같은 모두의 꿈이여, 행복해지길! 

이정화(주부/작가)

최문갑 기자
mgc1@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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