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제21대 국회의 시작은 일견 순조롭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상임위원장을 두고 벌어진 여야 사이의 긴장과 갈등에 혹자는 정치 혐오를 이야기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민주주의 그리고 삶을 말하려 한다. 민주적 절차를 거쳐 법이 제정되거나 개정되는 입법부, 한국 민주주의의 심장, 국회(國會)의 시작은 으레 한바탕 소동을 동반하지 않던가. 쿠키뉴스는 우리 삶과 직결되는 보건의료, 복지, 여성, 가정, 청소년을 주제로 새로운 시리즈 <21대에 부탁해> 시리즈를 시작한다.
[쿠키뉴스] 노상우 기자 = 수술실 CCTV 설치 의무화 법안, 21대 국회에선 통과될 수 있을까? 수술실 CCTV 설치 법안은 환자의 안전 확보 등 공익적 측면과 환자의 인권 침해, 의료진의 인권 문제, 의사-환자 상호 간 신뢰를 해칠 수 있다는 양측의 의견이 팽팽하다.
지난 2016년 9월 안면윤곽수술을 받은 권대희씨는 뇌사상태에 빠졌고, 49일 뒤 끝내 사망했다. 권씨의 어머니는 병원의 CCTV와 의무기록지 등을 입수해 아들의 죽음을 파헤쳤고, 수술 과정에 문제가 있음을 밝혀냈다. 이후 지난 20대 국회 기간인 지난해 5월 더불어민주당 안규백 의원이 권씨의 이름을 따 ‘권대희법’을 발의했다. 권대희법은 수술실 내 CCTV 설치를 의무화하자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안 의원은 의료기관 수술실에 CCTV 설치를 의무화해 의료사고가 발생한 경우, 피해자 측이 의료진의 과실을 입증해야 하는 한국의 법 체계 아래서 수술실 CCTV라도 있어야 그나마 사실관계를 따져볼 수 있다는 이유에서 발의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의료사고가 발생했을 때 병원으로부터 받은 의무기록지와 의료진의 증언 등만을 토대로 의료진의 과실을 입증해야 하기 때문이다. 의료진의 증언이 있더라도 법정에서 번복되는 경우가 부지기수고 의무기록지 또한 충실하게 적히지 않은 경우가 많아 과실을 입증하는 게 지나치게 어렵다는 평가가 있었다.
해당 법안은 발의 과정부터 난항이 거듭됐다. 법안이 발의된 지 하루 만에 공동발의했던 의원들의 철회가 잇따르면서 법안이 폐기됐었다. 공동발의를 철회한 의원실에서는 충분한 사회적 합의가 진행되지 않았다고 변명했었고, 우여곡절 끝에 재차 공동발의자들을 모아 재발의됐다. 하지만 해당 법안의 국회 상임위원회인 보건복지위원회에서는 논의조차 이뤄지지 못했고, 20대 국회가 끝나면서 결국 폐기됐다. 일각에서는 법안 폐기가 예고된 수순이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안 의원을 포함해 권대희법을 공동발의한 의원 모두 복지위 소속이 아니기 때문이다. 복지위 소속 의원들은 대한의사협회 등 관계 단체들의 적극적인 반대로 인해 소극적인 반응을 보인 게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됐다.
관련해 국가인권위원회는 올해 3월 수술실 CCTV 설치와 촬영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국회에 제출했다. 인권위는 “수술실의 폐쇄적 특징 및 환자 마취로 인해 주변 상황을 인지할 수 없는 점, 의료행위 제반과정에 대한 정보 입수에 있어 환자 및 보호자가 취약한 지위에 놓이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수술실 CCTV 설치와 촬영을 법률로 정하는 것은 공익 보호의 측면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권대희씨의 어머니인 이나금씨도 3월 청와대 국민청원을 통해 ‘권대희법’ 통과를 촉구했다. 이씨는 “공장식 수술을 하면서 제 아들을 방치했던 그 병원은 아직도 영업 중이고, 이 병원의 화려한 광고들이 온라인상에 걸려있어 억장이 무너지고 가슴을 쥐어뜯는다”면서 “수많은 의료사고 피해자 유족들은 증거가 있어 법정에서라도 한 번 싸워볼 수 있어 부럽다고 말한다. 그 증거가 바로 ‘수술실 CCTV’”라고 밝혔다.
이어 “일부 일탈한 의사들이 돈에 영혼이 병들어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법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생명을 상품 취급하며 끝없는 일탈행위를 자행하고 있다”며 “국민은 일탈한 의료진과 선량한 의료진을 구분하지 못한다. 본인이 직접 당하거나 경험으로만 가능하다. 이런 환경에서 우리국민, 대다수 사회적 약자는 스스로 일부 일탈한 의료진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서는 수술실CCTV 설치가 필요악이 됐다”고 강조했다.
의료사고로 인한 피해는 오로지 피해자의 몫으로 남게 된다는 것이다. 이씨는 “우리 국민 모두는 잠재적 환자이면서 누구나 의료사고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정부와 국회에서는 대다수 국민들이 원하는 수술실CCTV 설치법, 일명 권대희법을 조속히 입법화해 줄 것을 간곡히 촉구한다”고 밝혔다. 해당 청원에 대해서 1만6861명이 동의했다.
한편,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8일 수술실 CCTV 의무화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이 지사는 자신의 SNS에 “환자가 마취되어 무방비 상태로 수술대에 누워 있는 사이 대리수술, 추행 등 온갖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며 “극히 일부 부도덕한 의료인에 의해 비공개 수술실에서 여러 사람이 죽고 상처입으며 환자들은 불안해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법과 규칙, 그리고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충실하게 지키는 대다수 선량한 의료인들은 수술실 CCTV를 반대할 이유가 없고, 오히려 무너진 의료인에 대한 신뢰를 제고할 것”이라며 “수술실 CCTV는 일반 공개용이 아니라 필요할 때 환자의 확인에 응하는 용도일 뿐이다. 이미 상당수 의료기관이 내부용으로 촬영하고 있고, 심지어 설치 사실을 광고하는 의료기관도 많다. 환자가 의식을 유지한 채 마취하는 기술이 개발돼도 환자의 눈과 귀를 가리고 수술할 것은 아니지 않냐”고 반문했다.
이 지사는 “국가는 국민을 위해 국민을 대리해 국민의 뜻을 집행하는 도구이며, 국회의원이나 관료 역시 국민이 고용한 국민의 일꾼일 뿐”이라며 “국민의 뜻을 받들어 수술실 CCTV를 즉시 설치해야 한다. 국회도 누군가의 눈치를 볼 것이 아니라 국민의 뜻에 따라 수술실 CCTV 의무화법 제정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기도는 해당 정책을 확대하기 위해 ‘민간의료기관 수술실 CCTV 설치·지원사업’에 참여할 의료기관을 공개 모집한다고 밝혔다. 선정된 의료기관 1개 병원당 3000만원의 수술실 CCTV 설치비용 전액을 도에서 지원하기로 했다. 그러나 경기도 내 민간의료기관 중 단 한 곳도 신청하지 않았다. 경기도는 오는 19일까지 해당 사업 참여기관을 재공모하겠다고 밝혔지만, 의료기관이 참여할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의료계에서는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내세운다. ▲환자 인권 침해 ▲수술 질 저하 ▲의료진 인권 문제 ▲의사-환자 상호 간 신뢰 등의 문제로 수술실 CCTV 설치를 반대하고 있다. 외과계학회는 지난해 성명을 통해 “수술실 CCTV 설치 의무화는 법으로 모든 것을 막을 수 있다는 단순한 발상”이라며 “수술실에서 일어나는 환자 안전 이슈는 우리나라 의료시스템의 불합리성에 기인한 것이다. 외과계 의사의 부족을 해소할 수 있는 정책적인 지원과 안정성 보장, 수술환경을 개선할 수 있는 재정적 지원이 선행돼야 한다”고 밝혔다.
20대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서 가장 큰 쟁점 중의 하나로 부각됐지만, 상임위원회에서 논의조차 이뤄지지 않았던 수술실 CCTV 법이 이번 21대 국회에서 통과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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