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쿡리뷰] ‘사라진 시간’ 낯섦을 받아들일 용기

[쿡리뷰] ‘사라진 시간’ 낯섦을 받아들일 용기

‘사라진 시간’ 낯섦을 받아들일 용기

기사승인 2020-06-11 07:00:00


[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 흔히 ‘클리셰를 따르지 않았다’곤 한다. 기존 장르 영화의 문법대로 흘러가지 않는 순간을 뜻하는 말이다. 감독은 익숙함 위에 낯섦을 얹어 자신의 스타일을 보여준다. 영화 ‘사라진 순간’(감독 정진영)은 언뜻 평범한 한국 장르 영화처럼 보인다. 형사 역할을 맡은 주연 배우 조진웅의 존재부터,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알던 모든 것이 사라졌다는 핵심 서사도 전형적이다. 하지만 영화를 볼수록 기존 장르 영화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순간이 ‘사라진 시간’의 진짜 시작이다.

‘사라진 시간’은 세 가지 이야기가 연속적으로 나열된다. 첫 번째는 서울에서 지방 초등학교 교사로 내려온 수혁(배수빈)과 그의 부인 이영(차수연)의 이야기다. 시골에서 행복한 하루하루를 만나며 기뻐하던 두 사람에겐 한 가지 비밀이 있다. 그 비밀이 마을 사람들에게 알려지며 곤란한 일이 펼쳐진다. 두 번째는 수혁-이영 부부의 사건을 수사하게 된 형사 형구(조진웅)의 이야기다. 평범한 사건 뒤에 감춰진 비밀을 알아채며 조사를 이어가던 중 술에 취해 깊은 잠에 빠진다. 세 번째는 술에서 깨어난 교사 형구(조진웅)의 이야기다. 하루아침에 형사에서 교사가 되고 가족을 모두 잃어버린 그는 혼란에 빠져 자신의 흔적을 찾아다닌다.

이 세 가지 이야기는 이어지는 듯 잘 이어지지 않는다. 분명 앞선 이야기의 소재와 설정이 다음 이야기로 연결되는 걸 지켜보는 관객 입장에선 답답할 노릇이다. 장르적 문법으로 보면 형구가 처한 상황은 평행세계, 혹은 꿈처럼 느껴진다. 첫 번째 이야기는 끝까지 존재감을 잃지 않지만 어떤 식으로든 해석되지 못한다. 나중엔 감독이 만들어놓은 미로가 처음부터 탈출이 불가능했다는 걸 깨닫고 속은 기분마저 든다. 마지막 이야기에서 자신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형구의 모습에 이입하기 쉬운 이유다.

‘사라진 시간’을 이해할 수 없게 설계한 난해하고 이상한 영화로 보긴 어렵다. 영화는 매 순간 친절하게 상황을 설명하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앞으로 밀고 간다. 그 순간들이 아름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장르적 문법과 완성된 구조에 빠지지 않고 영화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면 영화가 전하려는 이야기에 한발 가까이 갈 수 있다. 의외의 순간에서 터지는 웃음과 예측 불가능한 전개는 ‘사라진 시간’에서만 느낄 수 있는 기묘한 매력이다.

결국 30년 넘는 세월을 배우로 활동한 감독 정진영의 데뷔작이라는 점이 ‘사라진 시간’에 관한 가장 큰 힌트다. 수혁-이영 부부의 말 못 할 비밀과 형구가 처한 낯선 상황, 그 모든 것들 거리감을 두고 지켜보는 마을 주민들의 시선은 모두 배우의 삶으로 향한다. 하지만 감독의 의도를 찾는 것도 좋지만, 관객 나름대로 해석을 해가며 감상하는 것이 더 좋을 영화다. ‘사라진 시간’에서까지 또 마을 주민들처럼 멀리서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감상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오는 18일 개봉. 15세 관람가.

bluebell@kukinews.com

이준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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