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정진용 기자 = “이게 일주일 치에요”
박점규 시민단체 ‘직장갑질119’ 운영위원이 손가락 한마디 두께의 서류철을 꺼내 보여줬다. 직장갑질119의 이메일함 gabjil119@gmail.com에 접수되는 구조요청은 하루 평균 15건 정도. 카카오톡 오픈채팅방과 온라인 모임(밴드)에서 호소하는 이들까지 합하면 더 많다. 갑질도 ‘가지가지’다. ‘성추행을 당했어요’, ‘사장 딸이 채용된 뒤 직원 8명이 나갔어요’, ‘노동청 신고 후 동료들이 은따(은근한 따돌림)를 시켜요’.
‘직장내 괴롭힘 금지법’(괴롭힘 금지법)이 내달 16일 시행 1년을 맞는다. 가슴 속 사표를 품고 묵묵히 출근하는 을들의 고충이 조금이라도 덜어졌을까. 박 운영위원을 22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 15층에서 만났다.
노동 전문가, 노무사, 변호사들이 모인 직장갑질119가 출범한 것은 지난 2017년 11월이다. 출범 이후 100일 동안 쏟아져 들어온 갑질 제보는 5000여 건에 달했다. 괴롭힘 금지법 시행 이전에는 신고 건수 1위가 임금체불, 2위가 직장내 괴롭힘 이었다. 법 시행 이후에는 순서가 역전됐다.
지난 3월부터는 회사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를 빌미로 갑질을 한다는 직장인들의 ‘SOS’가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직장갑질119가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지난 6개월간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실직을 경험했다고 답한 직장인의 비율이 12.9%로 조사됐다. 비정규직(26.3%)의 비율은 정규직(4.0%)의 6.57배였다. 박 운영위원은 “6월 기준으로 따지면 코로나19로 무급 휴직, 강제 연차, 임금 삭감, 해고 등의 불이익을 당했다는 신고가 전체의 30%를 넘게 차지한다”고 설명했다.
한국 직장 사회가 유독 갑질이 심한 걸까. 박 운영위원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박 운영위원은 “한국의 직장 문화는 한마디로 ‘까라면 까’로 정리할 수 있다”면서 “그 배경에는 유교문화, 공동체 주의, 그리고 군부독재 역사가 자리 잡고 있다. 학교도 직장도 군대처럼 운영됐다. 이를 완전히 체화한 기성 세대와 개인주의인 젊은 세대가 만나면서 충돌을 일으키고 있는 게 오늘날 사회의 모습”이라고 분석했다.
공고해 보이던 ‘까라면 까’ 문화에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박 운영위원은 “지난해 10월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괴롭힘 금지법을 알고 있냐는 질문에 72% 정도가 ‘그렇다’고 답했다. 직장인들의 제보 덕에 사회적으로 이 법이 널리 알려진 것 같다”면서 “법 시행 이후 달라진 점을 물어보니 확실히 그 전에 비해 폭언이나 모욕, 회식이 줄었다고 답했다. 또 직장의 권력자인 40~50대가 조심하고 후배들 눈치 보는 정도까지는 왔다고 생각한다”고 평가했다. 박 운영위원은 “40~50대들은 후배들한테 말 붙이기조차 어렵다고 토로한다. 역으로 생각해보면 그동안 얼마나 생각 없이 성희롱 발언, 막말을 했으면 그럴까 싶다”면서 “기성세대도 이제 상명하복 시대가 끝났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시대 변화를 읽지 못하면 회사 내에서 생활하기 어려워질 것”이라고 꼬집었다.
괴롭힘 금지법은 시행 초기 가해자에 대한 처벌 규정이 마련돼 있지 않아 ‘반쪽짜리’ 법안이 아니냐는 지적을 받았다. 직장 내 괴롭힘을 조사하는 주체가 사용자라는 점도 아쉬운 부분으로 꼽힌다.
박 운영위원은 괴롭힘 금지법 실효성은 고용노동부의 의지에 달렸다고 지적했다. 법에는 노동자가 괴롭힘을 신고하거나 피해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피해자나 신고자에게 해고 등 불이익한 처우를 할 경우 사용자는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을 물어야 한다는 처벌 조항이 명시돼있다. 법 사각지대로 지적되는 5인 미만 사업장, 원청 갑질, 친인척 갑질도 노동부가 근로감독을 실시할 수 있다.
박 운영위원은 “노동부가 의지만 있다면 법 개정 없이도 당장 실효성을 높일 수 있다”며 “노동부가 자신의 권한을 적극적으로 행사해야 되는데 존재감이 없다. 괴롭힘 금지법이 반쪽짜리 법도 아니고 ‘괴롭힘 방치법’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직장갑질119에서는 법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가해자 형사 처벌, 친인척·원청·주민 등 법 적용 대상 확대, 조치 의무 불이행 처벌 조항 신설, 4인 이하 적용, 의무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박 운영위원은 “21대 국회에서는 야당 반대 때문에 법 못 바꾼다는 핑계가 통하지 않는다”면서 “5대 과제를 올해 안에 국회에서 통과시키는 게 목표”라고 설명했다.
변화가 시작됐지만 가야 할 길은 멀다. 지난 3월 전북 익산 오리온 공장 근로자 고(故) 서지현씨가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만 22살의 꽃다운 나이였다. 유가족은 성추행 등 직장내 괴롭힘으로 고인이 이 같은 선택을 했다는 입장이다. 노동부 익산지청은 시민단체와 지역사회의 끈질긴 요구 끝에 최근에서야 특별근로감독에 나섰다.
박 운영위원은 “그동안 한국 사회의 최우선은 기업이었다. 노동자의 죽음을 비용으로 생각하는 오래된 관행, 그리고 정경 유착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며 “이제 달라져야 한다”고 했다. 그는 “지금도 직장내 괴롭힘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당신 잘못이 아니라 회사 잘못’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용기를 잃지 말자. 기록 하자. 그리고 뭉치자. 이 세 가지가 사회를 바꾸는 작은 힘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jjy4791@kukinews.com/ 사진=박태현 기자 pth@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