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화의 티타임에 초대] 걱정전문가, 걱정동행자

[이정화의 티타임에 초대] 걱정전문가, 걱정동행자

이정화 (주부 / 작가)

기사승인 2020-08-17 13:34:29
▲이정화 작가
나는 '걱정전문가'다. 걱정스러운 사람을 걱정하는 일이 나의 역할이고 본질이다. 나는 본질에 충실하게 비오는 날엔 짚신장수를 맑은 날엔 우산장수를 걱정한다. 내 아이들을 걱정하고 내 부모를 걱정하고 남편을 걱정하다가 세상의 다른 가장을 걱정한다. 코로나의료진을 걱정하고 학대받은 아이를 걱정하다 수재민을 걱정한다. 

‘프로걱정녀’로서 나는 남의 일만 걱정하고 나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는다. 프로축구선수가 동네조기축구를 뛰지 않는 것과 같다할까. 어차피 전업주부로서의 내 사회적 기능은 우리 국민, 어디 시민인 것 외엔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내, 누구의 딸과 며느리 등, 부속이거나 접속사 같은 존재라 직접 일을 벌이지도 않으니 독자적인 걱정거리가 별로 없기도 하다. 그리고 이 점은 개인적으론 좀 씁쓸하지만 걱정전문가의 자질과 원칙을 생각할 땐 떳떳하다. 

사실 걱정은, 누가 함께 해준다고 해서 뭔가 쉽게 해결이 되거나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그런 점에선 걱정이란 각자의 꿈이나 부채처럼 저마다의 독립자산일 수도 있다. 그러나 관계 속에 엮인 사회적 인간으로서 남의 희비와 성패에 전혀 영향을 안 받을 수도 없으니, 나는 남들의 걱정을 함께 해주며 이왕이면 그러는 내게 자발적, 능동적인 역할을 부여해주기로 했다. 일 중엔 기획을 하는 사람, 실제로 운영을 하는 사람, 감수를 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데 그 중 나는 시간과 과정에 맞춰 함께 걱정을 해주는 사람이고, 금융전문가나 여행전문가가 있듯이 걱정전문가나 걱정동행자라고.  

백과사전에서 ‘걱정’의 정의 첫줄엔 ‘여러 가지로 마음 쓰이는 감정을 의미하며 불안의 일종으로 볼 수도 있다’고 쓰여 있다. ‘불안의 일종’이란 말 때문인지 사람들은, 자신은 어떻던 남들에겐 대부분 ‘걱정하지 말라’고 말한다. 걱정하지 않는 것을 대범하거나 지혜로움의 표상으로 여기며 반대로 걱정이 많으면 여리거나 어리석게 보는 경우도 있다. 사실 ‘걱정’이 보험노릇을 해주는 것도 아니라 나 역시 걱정만 해주는 무력함이 한심하고 답답하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비극도 직접 당하는 당사자에겐 불행 중 다행이란 없으니, 어떤 대책을 주는 것도 없이 남들에게 툭하면 ‘걱정하지 말라’고만 하는 것 또한 가끔은 무심하고 안타깝게 보인다. 

종교적으로도 ‘불안’이나 ‘근심’은 영혼을 갉아먹는 나쁜 마음이라고 한다. 든든하게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면 그런 마음은 없어야 할 것이다. 나도 적지 않은 시간을 살아오며, 깊은 절망의 바닥에서 오히려 다시 올라갈 수 있는 은혜와 감사함을 찾기도 했다. 그러나 부모가 여러 자식을 똑같이 사랑해도 아이마다 든든하고 허약한 각자의 특성을 이해하고 받아주듯 어쩌면 하느님과 우리에게도 특별한 소통이 있을 거라고 믿는다. 어떤 사람의 걱정은 열렬한 기도이고 절박한 의지며, 불안한 칭얼거림이 아니라 믿으니까 두드리고 매달리는 것인데 사랑이 많으신 하느님이 그걸 모르실리 없다.

나는 요즘 내 일에 열심이다. 최선을 다해 걱정한다, 그런데도 코로나사태 이후 왜 이번 폭우는 또 이토록 모질었을까. 모든 피해는 왜 더 약하고 더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이 입는 걸까. 왜 가난한 농부는 일 년 농사를 망쳐야했고 약한 어미는 자식을 잃어야했을까. 분명 나의 기도는 하늘까지 닿기엔 턱없이 모자랐던 것이다. 그러나 걱정도 마음이라, 마음은 곧잘 사람 사이에 길을 만든다. 하늘까진 못 닿았어도, 수해를 입은 사람들에겐 세상에 혼자가 아님을 알려줄 수 있다. 백과사전에서도 걱정은 결국 ‘미래에 대처하는 효과적인 문제해결과정에서 발현하는 감정상태’로 규정한다. 수마가 할퀴고 간 이 나라에 나의 걱정과 우리의 걱정, 나의 기도와 모두의 기도를 합쳐 힘을 모으고 싶다. 함께 걱정할게요, 함께 힘내요, 우리.
최문갑 기자
mgc1@kukinews.com
최문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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