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이은호 기자 =이번 주 MBC ‘나 혼자 산다’는 ‘패스’하기로 했습니다. 초대 손님으로 나온 배우 곽도원의 제주도 살이와 개그우먼 박나래의 동생 신혼집 방문기가 그려진다더군요. 두 사람이 싫어서 ‘나 혼자 산다’를 안 보려는 건 아니에요.(지난주 곽도원이 의자에 거의 눕듯 앉은 모습은 전 회사의 부장님을 떠올리게 만들어 괴롭긴 했지만요), 다만 TV에서 웹툰작가 기안84를 보는 것이 매우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패스’가 아니라 ‘보이콧’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욱 정확하겠네요.
기안84를 둘러싼 논란은 다들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가 네이버 웹툰에 연재 중인 ‘복학왕’의 303~304화 ‘광어인간’ 편이 ‘무능한 여성 인턴 봉지은이 남성 상사와 성관계한 대가로 정직원이 됐다’는 내용을 암시해 비판받은 일 말입니다. 기안84는 “봉지은이 (성관계가 아닌) 귀여움으로 승부를 본다는 설정을 추가해 이런 사회를 개그스럽게 풍자”했다며 사과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난 14일 방송한 ‘나 혼자 산다’에 평소와 마찬가지로 등장했지요.
저는 기안84가 풍자했다는 “이런 사회”를 알지 못합니다. 제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사회는 여성이 “귀여움으로 승부”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여성들은 채용부터 인사고과평가, 승진 등의 과정에서 누적적으로 성차별을 겪습니다. 최근만 해도 대전MBC가 20년 넘게 여성 아나운서를 계약직이나 프리랜서로만 고용해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같은 기간 남성 아나운서들은 정규직 자리를 따냈지요. 성적인 매력을 어필해 일자리를 얻는다고요? 직장 내 성폭력을 당하고도 일자리를 잃을까 걱정해야 하는 곳이 우리나라 여성 노동자들이 사는 사회입니다.
누군가는 말하더군요. 만화는 만화일 뿐이라고요. 그런데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개그는 개그일 뿐’이라는 말이 배부해준 면죄부가 이 사회를 어떻게 만들었던가요? ‘된장녀’ ‘김치녀’ ‘김여사’ 등 여성을 악마화한 허구의 개념으로 실제로 벌어지는 여성 혐오의 불씨를 댕기지 않았던가요?
저는 기안84가 비슷한 잘못을 되풀이할 때마다, 그리고는 ‘나 혼자 산다’에서 짐짓 주눅 든 표정을 지으며 동료 연예인들에게 질타를 가장한 위로를 받을 때마다, ‘이렇게 살아도 된다’는 메시지를 전달받는 것 같았습니다. 여성이 고용 과정에서 겪는 차별을 지우고 허구의 ‘꽃뱀’ 이미지를 반복해도 된다, 장애인과 이주 노동자에 대한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되풀이해도 된다, 30세가 넘은 여성을 두고 “누나는 늙어서 맛없어”라고 표현해도 된다, 상대나 보는 이를 불쾌하게 만드는 무례한 언행을 고치지 않아도 된다. 왜? 기안84는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태어난 김에 사는 남자’ ‘방송 부적응자’가 그의 캐릭터니까.
그래서 저는 ‘나 혼자 산다’를 보지 않기로 했습니다. 시청자이자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기안84의 발언이 옳지 못하다는 제 나름의 의사 표현인 겁니다. 하지만 때론 괴롭습니다. 저는 ‘나 혼자 산다’를 좋아했으니까요. 휴대전화에 기종이 다른 케이스를 억지로 욱여넣은 손담비를 보는 게, 장도연이 박나래의 대상 수상에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 게, 아무렇게나 김밥을 싸면서도 만족스러워하는 김연경을 보는 게, 박세리의 거대한 식료품 창고를 보며 “얼었다가 (냉장고에서) 나오면 칼로리가 적어진다”는 그의 다이어트 지론을 듣는 게 좋았으니까요.
‘나 혼자 산다’가 여성의 다양한 삶을 긍정하게 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나의 의도는 기안84에 대한 항의였는데, 그것이 ‘나 혼자 산다’의 여성들도 함께 외면당하는 결과를 불러오는 것은 아닐까, 행여 ‘나 혼자 산다’ 불매로 인한 피해를 여성 출연자들도 나눠서 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더는 약자 혐오적 웹툰을 그리는 작가에게 확성기를 쥐여주지 않겠습니다. 제게 그의 확성기를 빼앗을 힘은 없더라도, 적어도 그 소리의 크기는 줄일 수 있을 테니까요.
서울 마포구에서, 전직 시청자 올림.
wild37@kukinews.com / 사진=MBC ‘나 혼자 산다’ 방송화면, 웹툰 ‘복학왕’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