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이은호 기자 =창문 너머로 불어오는 가을바람이 달게 느껴지는 요즘입니다. 당신께 첫 번째 편지를 보내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이에게 지면을 통해 인사하려니, 영 어색하고 멋쩍네요. 부디, 뻔하디뻔한 날씨 얘기가 우리의 첫 대화로 나쁘지 않은 주제였길 바라요.
당신은 어떤 일상을 보내고 있나요. 저는 지난 며칠간 괴로웠어요. 지난 10일 방송한 MBC ‘다큐플렉스-설리가 왜 불편하셨나요?’ 때문이에요. 방송에선 설리의 생전 일기장이 공개됐고, 그의 옛 연인이 거론됐고, 가정사가 들춰졌어요.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엔 설리의 옛 연인이 올랐고, 포털사이트 연예뉴스 페이지에도 그와 관련한 뉴스들이 빼곡했어요. 다음날 오후부터는 기사의 논조가 달라지기 시작했는데, ‘다큐플렉스’가 설리의 옛 연인을 향한 마녀사냥을 유도했다는 지적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쓴웃음이 났어요. ‘다큐플렉스’를 비판한 언론사 대부분이 방송 당시엔 최자를 거론한 기사를 냈으니까요. 자신들이 기사화한 내용을 자신들이 비판하는 촌극인 게지요. 부끄럽지만, 우리 회사도 그랬어요. 오전엔 ‘다큐플렉스’ 내용을 베껴 써놓고, 오후엔 ‘다큐플렉스’를 문제 삼았어요. 저는 “[쿡기자] ‘설리 다큐’와 유체이탈”이라는 기사에 “이것이 유체이탈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입니까”라고 썼어요. 하지만…, 그래요. 우리 회사의 기사 역시 “유체이탈”의 하나였습니다.
누군가 제게 그러더군요. 기자에겐 ‘쓰지 않을 용기’도 있어야 한다고요. ‘다큐플렉스’가 방송한 이후 유족과 친구들 사이에 설전이 오간 것으로 압니다. 포털사이트엔 또다시 고인 주변인의 SNS를 받아쓴 기사가 쏟아져 나왔지요. 저는 쓰지 않을 용기를 내기로 했어요. SNS에 올라온 글만으로는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이것이 국민의 알 권리와 무관하다는 게 두 번째 이유였어요. 고인의 심중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고인의 가정사를 거론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느껴지기도 했고요. 기사 조회수를 높이는 것은 여전히 제게 중요한 문제예요. 하지만 그걸 위해 직업인으로서의 윤리의식을 져버리고 싶진 않았어요. 저는 이미 너무나도 많은 ‘기레기 짓’을 저질러 왔는걸요.
어떻게 해야 좋은 기자가 될 수 있을까요.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기레기’는 되고 싶지 않습니다. 기자의 품위를 실천으로써 지키고 싶습니다. 이마저도 쉽지는 않습니다. 제목은 자극적이어야 눈에 띄고 내용은 알맹이가 없을수록 쉽게 읽히니까요. 가끔은 억울하기도 해요. 공 들여 기획 기사를 써도, 독자들의 관심은 어뷰징 기사로만 쏠린다고 느끼거든요.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언론사가 경쟁하는 온라인 세상에서, 자극적이고 과격한 언어를 쓰지 않고도 존재감을 드러내는 게 가능할까요. ‘충격’ ‘헉!’ ‘은밀한’ ‘숨 막히는’ 같은 표현을 쓰지 않고도 독자들의 선택을 받을 수 있을까요. 보도 윤리를 지키며 성실하게 기사를 쓰면, 그에 마땅한 보상이 언젠가는 주어질까요. 기자도 구조의 피해자라는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개인의 노력만으로 구조를 바꾸는 게, 정말 가능할까요.
‘다큐플렉스’ 다음날 방영했던 tvN ‘비밀의 숲2’에는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서동재(이준혁) 검사 납치 사건을 수사하던 경찰에게 범인이 보낸 메시지가 도착해요. 피해자 생사는 불확실하지, 용의자는 파악도 못 했지, 인력은 부족하지…. 경찰들 사이에선 볼멘소리가 터져 나옵니다. 그러자 한여진(배두나)이 말해요. “범인이 경찰을 얼마나 우습게 알면 이런 걸 띡 보내요, 지가? 여기가 어디라고? 미친놈한테 이런 취급 당하고, 분하지도 않으세요?” 저는 그 말을 듣고 이 편지를 써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저도 한여진처럼 제 일에 대한 자존감을 지키고 싶었거든요. 어느 길이 옳은 건지 여전히 혼란스럽습니다. 다만, 그때마다 저는 제가 가지 말아야 할 길을 생각하려 해요.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더 나아질 거라고 믿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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