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쿡리뷰] ‘도굴’ 두 개의 오프닝과 텅 빈 질주

[쿡리뷰] ‘도굴’ 두 개의 오프닝과 텅 빈 질주

기사승인 2020-11-04 06:48:02
▲ 영화 '도굴' 포스터

[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 영화 ‘도굴’(감독 박정배)의 오프닝은 두 개다. 하나는 땅을 찌르며 명당을 찾던 남자들에 의해 흙 속의 아이가 발견되는 장면, 또 하나는 동구(이제훈)가 승복을 입고 황영사 9층 석탑 앞에서 마당을 쓰는 장면이다. 자연스럽게 흙 속에서 발견된 아이가 커서 도굴꾼 동구로 성장했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도굴’은 맨 처음 등장하는 아이에 대한 사연은 없었던 일처럼 모른 척하며 성인 동구의 이야기로 무작정 전개해나간다.

‘도굴’은 고미술 큐레이터 윤실장(신혜선)에게 매력적인 제안에 도굴에 소질을 타고난 동구가 벽화 전문인 존스 박사(조우진), 삽질 전문인 삽다리(임원희)를 모아 도굴을 벌이는 이야기를 다룬다. 일종의 케이퍼 무비처럼 황영사 9층 석탑 속 불상, 중국 지안에 위치한 고구려 고분 벽화, 강남 한복한 선릉까지 여러 장소를 옮기며 신나고 코믹한 모험극을 그린다. 이들의 상대는 국내 고미술 협회장이자 막대한 자금력을 손에 쥔 회장 상길(송영창)이다. 언제든 무력을 행사해 미술품을 강탈할 준비를 마친 상길을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어낼지 지켜보게 된다. 영화가 깜박 잊은 줄 알았던 첫 오프닝은 후반부에 다시 이야기를 이어간다. 당황하지 않도록 꼼꼼히 복선을 깔아두는 것도 잊지 않는다.

‘도굴’이라는 신선한 소재를 스크린에 구현해내는 걸 지켜보는 재미, 기 싸움에서 밀릴 생각이 조금도 없는 배우들이 차진 대사로 합을 맞추는 걸 지켜보는 재미가 시선을 붙든다. 할리우드 영화 ‘나우 유 씨미’ 시리즈나 국내 영화 ‘도둑들’, ‘타짜’ 시리즈처럼 장소를 옮겨가며 심리전을 벌이는 장르적 재미도 숨죽이고 감상하게 하는 매력 요소다. 마지막 도굴을 관객들에게 익숙한 선릉으로 선정한 과감한 접근도 인상적이다.

▲ 영화 '도굴' 스틸컷

다만 인물들의 캐릭터와 욕망을 다루는 면에선 디테일이 부족해 아쉬움을 자아낸다. 무게감 있는 등장에 비해 존스 박사와 삽다리는 갈수록 역할을 잃고 단순한 코믹 조연으로 전락한다. 후반부에 갈수록 동구와 상길, 두 사람의 전면전처럼 그려지지만, 무엇을 위해 그토록 화를 내고 다투는 것인지 명확히 알기 어렵다. 오프닝이 두 개여야 했던 이유도 대결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다만 인물들의 전략과 기술이 영리한 만큼 세속적인 욕망이 함께 따라가기 마련인 케이퍼무비 장르에서 ‘도굴’은 범죄라는 걸 의식하는 탓인지 자꾸만 선한 방향으로 몸을 돌린다. 좋은 일을 위해 어렵고 고된 범죄를 벌이는 인물들에게 갈수록 이입하기 힘든 이유다.

그 안에서 배우 신혜선이 연기한 윤실장은 유일하게 정신을 놓지 않고 제 할 일을 해내는 캐릭터다. ‘도굴’은 윤실장 역시 동구의 꾀에 당한 것처럼 그리지만, 목표를 향해 인내하고 조용히 질주한 끝에 조금이라도 원하는 것을 이뤄낸 건 그밖에 없지 않을까. 안정적으로 대사의 맛을 살려내는 배우 이제훈의 연기와 윤실장을 자꾸 응원하고 싶어지는 캐릭터로 완성한 신혜선의 연기는 차기작을 기대하게 한다.

4일 개봉. 12세 관람가.


bluebell@kukinews.com
이준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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