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쿠키뉴스] 노재현 기자 =영남유림에는 지난 400년간 이어온 깊은 갈등이 있다.
퇴계 선생의 제자인 학봉 김성일과 서애 류성룡간에 빚어진 마찰이다.
이런 영남의 대표적인 유림간 갈등인 ‘병호시비(屛虎是非)’가 ‘호계서원’ 복설 교유제를 계기로 종지부를 찍는다.
‘병호시비(屛虎是非)’는 병산서원의 병(屛)자와 호계서원의 호(虎)자를 따서 붙여졌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서원 중 하나인 호계서원은 1573년 여강서원으로 창건된 후 숙종 2년(1676년)에 사액되면서 바뀐 명칭이다.
영남유림의 갈등은 ‘호계서원’에 퇴계 선생의 제자인 학봉 김성일과 서애 류성룡을 배향하는 위패 서열을 두고 불거졌다.
3차례에 걸쳐 빚어진 갈등은 문중을 넘어 제자들 간 보이지 않은 대결구도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1차 시비는 1620년 퇴계를 모신 여강서원에 네 살위인 학봉을 상위에 모시자는 '장유유서(長幼有序)'와 영의정을 지낸 서애를 상위에 모시자는 '관작(官爵)'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이에 위임을 받은 영남학맥 좌장 우복 정경세가 서애 류성룡을 상석으로 결정하면서 일단락됐다.
병호시비 2차 논쟁은 1805년 불거졌다.
이번에는 영남유림에서 성균관 문묘(文廟)에 영남을 대표하는 4명의 유학자를 종사(從祀)하게 해 달라는 상소를 올리면서 학봉-서애 순으로 결정된 것이 발단이 됐다.
이에 서애 제자들이 반발하며 독자적으로 상소를 추진했지만, 조정에서 상소문을 모두 기각해 갈등은 수면 밑으로 내려갔다.
병호시비 3차 논쟁은 퇴계 선생 수제자 가운데 학봉과 서애 문중과 제자들의 다툼으로 문묘배향의 기회를 잃어버린 한강과 여헌의 제자들의 상소문이 문제를 일으켰다.
한강과 여헌의 제자들이 상소문을 통해 유림에 ‘학봉, 서애...’순으로 통문하자 서애 제자들은 호계서원과 결별하고 병산서원으로 회향하면서 갈등이 오늘날 까지 이어진 것이다.
때문에 안동유림도 학봉(호계서원)과 서애(병산서원) 두쪽으로 갈라질수 밖에 없었다.
이처럼 해묵은 갈등은 20일 호계서원 복설 고유제로 말끔하게 해소됐다.
경북도의 중재로 유림에서 류성룡은 퇴계 위패의 동쪽, 김성일은 서쪽, 그 옆에 김성일의 후학인 이상정을 배향하기로 합의했기 때문이다.
한편, ‘호계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된 후 7년 뒤 강당만 새로 지은 채 남겨졌었다.
하지만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1973년 임하댐 아래로 이건 됐으나, 습기로 서원건물 훼손이 우려되자 지역유림 등에서 이건과 복원을 요청했다.
이에 경북도는 2013년부터 총사업비 65억원을 들여 도산면 서부리로 이건 및 복원을 추진해 지난해 말 안동시 도산면 한국국학진흥원 부지에 복설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된 호계서원은 1만㎡의 부지에 13동의 서원건물로 구성됐으며, 총 93칸에 이른다.
이날 호계서원 복설추진위원회(회장 노진환) 주관으로 진행된 호계서원 복설고유제 행사에는 이철우 경북도지사, 임종식 경북교육감, 윤동춘 경북경찰청장, 권영세 안동시장을 비롯해 지역의 유림대표 등 50여명이 참석해 축하를 건넸다.
초헌관으로 참석한 이철우 지사는 “이번 호계서원의 복설은 영남유림의 합의에 의해 대통합을 이뤄낸 성과”라면서 “화합, 존중, 상생의 새 시대를 여는 경북 정신문화의 상징이 될 것”이라고 기대를 나타냈다.
이어 “이런 화해와 대화합의 상생 메시지가 지역의 미래를 좌우할 통합신공항 건설과 대구‧경북행정통합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정신적 구심점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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