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강한결 기자 = 2020년 연말, 여러 가지 의미로 가장 많은 관심을 끈 게임은 단연 '사이버펑크2077'이겠죠. 출시 전부터 엄청난 기대를 모았던 작품이라 게이머들의 기대감이 커질 것은 당연해 보였습니다.
오죽하면 초고사양을 요구하는 덕분에 PC를 업그레이드 하겠다는 게이머들도 늘어나고 있다는 얘기도 나올 정도죠. 2017년 당시 '배틀그라운드' 열풍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물론 치명적인 버그, 아직 구현이 제대로 되지 않은 듯한 부분이 많다는 점에서 비판의 여론도 많습니다. 발매 전 CDPR 측이 강조한 '상상 이상의 오픈월드'라는 내용도 과장이 섞였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이번에는 게임적 측면보다는 '사이버펑크'라는 장르에 대해 심도있는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기자는 몇몇 지인들로부터 "'사이버펑크2077'가 요즘 그렇게 핫하다는데 해보는 것은 어떠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사이버펑크(Cyberpunk)에 대한 정확한 뜻을 모르겠다"며 "사이버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알겠다만, 펑크라는 개념을 정확히 모르겠다"고 묻더군요.
사이버네틱스는 미국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이며 MIT의 교수인 노버트 위너가 제안한 개념으로 동물(인간)과 기계를 통제하거나 그들과 소통하는 것을 다루는 학문입니다. 21세기 이후 '사이버(Cyber)'라는 접두어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가상의, 컴퓨터의' 등의 의미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문제의 '펑크(Punk)'는 무엇일까요. 우선 펑크를 관통하는 개념은 비주류입니다. 단어의 뜻 자체가 '폐물', '못 쓰는 것'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도 하죠. 1970년대 중반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펑크문화(Punk subculture)가 등장했습니다. 프롤레타리아 청년들의 반항으로 대표되는 이 문화는 음악 장르인 펑크 록과 함께 전개되기도 했는데요. 펑크문화의 발현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경제·사회적 부조리를 비판하며 대규모 사회운동을 주도한 68운동 세대의 변질이 가장 주된 원인으로 분석됩니다.
미국 작가 브루스 베스키는 1980년 미성년의 해커 집단을 다룬 '사이버펑크!(Cyberpunk!)'라는 단편소설을 발표했습니다. 이후 1985년 SF평론가 가드너 도즈와는 사이퍼펑크를 종래의 5·60년대의 SF문학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SF 서브장르를 가리키는 신조어로 사용했습니다. 긍정적인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기존의 SF소설에 반기를 든 부정적 미래물을 사이버펑크라고 칭하기 시작한 것이죠.사이버펑크의 기원을 알아봤으니 장르적 특성도 확인해봐야겠죠. 사이버펑크의 핵심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디스토피아적 세계관, 과학만능주의의 폐해로 인한 '하이테크-로우 라이프', 국가나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개인 혹은 대형 집단. 사이버펑크 장르물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요소입니다.
미래세계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했지만, 이 기술을 대형 기업 혹은 소수가 독점하고 있는 사회의 분위기는 암울하고 음침합니다. 이로 인해 빈부격차 역시 극도로 벌어졌는데요, 과학기술은 극도로 발달했지만 서민들의 삶은 피폐합니다. 메갈로폴리스와 마천루가 가득하지만, 슬럼가에 시민들은 전자 마약, 매춘 등 퇴폐적 요소에 빠져 살기도 하죠. 인체개조를 한 사이보그도 등장하고요.
사이버펑크를 대표하는 작품으로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와 '매트릭스'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1982년 제작된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는 2019년의 LA를 시공간적 배경으로 설정했는데요. 따듯한 햇살과 맑은 날씨의 LA는 스모그와 산성비로 인해 어둡고 암담한 도시가 됐습니다. 작중 등장하는 인조인간 '레플리칸트'는 인간과 동등하거나 우월한 수준의 지능과 힘을 가지고 있지만, 사람들은 이들을 경멸합니다.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 역시 사이버펑크를 단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영화죠. 사이버 공간 속에서 AI에 지배당하는 인류는 현실과 가상을 구별할 수 없는 단계까지 이르게 됐죠. 또한 디지털로 난무하는 미래지향적 세상에서 인간은 사실상 기계의 연료로 사용된다는 디스토피아적 세계관 역시 사이퍼펑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공교롭게도 주인공 네오 역을 맡은 '키아누 리브스'가 '사이버펑크 2077'에서 NPC로 등장한다는 것도 흥미롭네요.2018년 출시된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 역시 사이버펑크 장르로 분류되는 게임입니다. 안드로이드가 보편화된 미래를 배경인 이 게임은 안드로이드와 사람간의 갈등을 주제로 하고 있는데요. 인간들은 안드로이드가 일자리를 빼앗기고 있다며, 모두 없애야 한다는 등의 주장을 합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플레이어는 안드로이드와 인간의 차이가 무엇인지 고찰하게 됩니다.
SF 서브장르에는 사이버펑크 외에도 스팀펑크와 디젤펑크가 포함돼있습니다. 두 장르는 사이버펑크에서 파생된 문학장르인데요, 이에 대해서도 간략히 알아볼까요.
먼저 스팀펑크는 증기기관의 발달에 의한 산업혁명이 진행 중이던 19세기 전후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등을 무대로 SF적이거나 환상적인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역사의 재해석을 시도한 장르물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주로 산업혁명 시기의 유럽을 중심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황동'으로 이뤄진 기계장치들이 핵심소재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재밌는 점은 사이버펑크·디젤펑크와 달리 마법과 초자연적 현상 등 판타지적 요소가 들어가기도 한다는 것 입니다. 이같은 특성으로 음울한 세계관의 사이버펑크에 비해 스팀펑크의 분위기는 비교적 동화적이고 낭만적인 편입니다.
스팀펑크의 영향을 받은 작품에는 공통적으로 증기기관이 등장합니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인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 가운데는 이런 색채가 드러나는 작품이 많은데요. '하울의 움직이는 성', '천공의 성 라퓨타'를 예로 들 수 있겠네요. 두 작품 모두 19세기 말 유럽을 배경으로 삼고 있으며, 증기기관이 등장하죠. 특히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세계관은 마법이 존재하고 기계가 발달한 세상으로 스팀펑크의 특징이 잘 드러납니다.디젤펑크는 스팀펑크에서 파생된 장르로 화석연료가 발달한 20세기 현대 산업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스팀펑크와는 겹치는 부분도 상당히 많은 편이지만, 그중에서도 미국의 불황기이자 황금기인 1920~1950년대의 시대상을 반영한다는 것도 차이가 있습니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전쟁과 무기등의 요소가 많이 등장합니다. 그렇기에 세기말 무법 세계를 그린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디젤펑크의 경우 강철을 소재로 한 유선형의 사물이 자주 등장합니다.
기자의 '최애' 애니메이션 중 하나인 '강철의 연금술사' 역시 디젤펑크적 성향이 짙게 묻어나는 작품인데요. 실제 작품 내의 배경은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그 사이의 느낌을 주고요. 라디오 방송국이나 등장하는 전차 등의 병기류 역시 디젤펑크적인 색채가 묻어납니다. 또한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인 반전주의 역시 디젤펑크에 가까운 요소입니다. 물론 연금술과 같은 스팀펑크적 요소도 가미가 돼있습니다.대체적으로 사이버펑크의 세상은 정보통신기술 기기·인공지능 등 첨단 기술에 대한 공포감 혹은 적대감을 느끼는 테크노포비아적인 관점으로 그려지는 편인데, 현실에서도 의외로 이러한 경험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2016년 구글의 딥마인드가 개발한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와 이세돌 전 바둑9단의 대결을 기억하시나요.
비록 5번기 4국에서 180수 만에 백 불계승을 거두긴 했지만, 최종 승자는 알파고였습니다. 당시 인공지능이 이정도로 발전했다는 사실에 충격받았다는 사람도 제법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사이버펑크의 꾸준한 인기 배경에는 기술 발전 속도가 인류의 생각보다 더 빠르다는 점도 있겠죠. 과학기술에 의존하면서도, 어느순간 이를 통제할 수 없는 순간이 올 것이라는 불안감이 인류에게 내재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독자분들 가운데도 '사이버펑크2077'을 구매한 분들이 많으리라 생각되는데요. 직접 게임을 즐기며 분위기를 체감하는 것도 좋지만, 관련된 장르가 나온 배경지식에 대해 알고 게임을 한다면 더욱 몰입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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