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롯, 어디까지 들어봤니? [트로트의 맛]

트롯, 어디까지 들어봤니? [트로트의 맛]

기사승인 2020-12-19 07:00:27
▲ '미스터트롯' 서울 콘서트 1주차 공연 모습
[쿠키뉴스] 이은호 기자 =트로트는 올해 가장 사랑받은 음악 장르 중 하나이자 아이러니하게도, 음악적인 가치를 가장 인정받지 못하는 장르이기도 하다. 누군가에게 트로트는 ‘시청률 치트키’다. 누군가에겐 재기의 발판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자기 PR의 수단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트로트는 하나의 현상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긴 이야기를 가진 음악이다. 한국 대중음악의 태동과 함께 시작된 트로트의 역사를 각 시대를 대표하는 음악과 함께 살펴본다.

■ 이난영 ‘목포의 눈물’(1935년)

‘트로트’라는 명칭이 생긴 것은 1960년대 이후이지만, 트로트 양식이 자리 잡은 건 일제강점기였던 1930년대 전후였다. 초기엔 ‘라시도미파’의 단조 5음계에 2박자가 결합한 양식이 널리 사용됐다. 1935년 발표된 ‘목포의 눈물’이 대표적이다. ‘목포의 눈물’은 조선일보가 후원한 향토 찬가 모집에서 당선된 곡으로, 발매되자마자 큰 인기를 얻으며 가수 이난영을 스타덤에 올랐다. 얼핏 임을 향한 그리움을 나타내는 내용으로 들리지만, 2절에 등장하는 ‘삼백년 원한품은 노적봉’이라는 가사가 일본에 대한 원한을 에둘러 표현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시기 유행하던 트로트는 특히 임이나 고향을 잃은 상실감을 표현한 경우가 많은데, 이것이 당대인의 정서에 부응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 박재홍 ‘울고 넘는 박달재’(1948년)

1940년대 초부터는 백년설의 ‘나그네 설움’을 비롯해 장조 트로트가 새롭게 등장해 단조 트로트와 함께 불렸다. 가사 내용을 보면, 광복과 분단 등 당시 세태를 반영한 노래와 낭만적 경향의 노래가 공존했다. 가수 박재홍이 부른 ‘울고 넘는 박달재’는 후자의 대표적인 예다. 작사가 반야월이 악극단 지방순회 공연 중 충주에서 제천으로 가는 길에 남녀가 이별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이 노래 가사를 썼다고 알려졌는데, ‘물항라 저고리’ 등의 단어가 서민적이고 토속적인 느낌을 준다. 1950년대를 전후해 향토적인 소재와 정서의 트로트가 인기를 얻으면서, 일제강점기 시절 신식 노래로 인식되던 트로트가 전통의 음악으로 토착화되기 시작했다.

■ 이미자 ‘동백아가씨’(1964년)

한국 전쟁 휴전 이후 서양 대중음악이 국내에 유입되면서, 국내 음악 시장은 7음계에 기반을 둔 스탠더드 팝과 트로트 계열 노래로 양분됐다. 특히 이미자가 부른 ‘동백아가씨’는 쇠락의 조짐을 보이던 트로트의 인기를 다시금 높인 히트곡으로 꼽힌다. 배우 엄앵란과 고 신성일 주연의 영화 동백 아가씨의 주제곡으로, 이 곡이 실린 음반은 국내 가요로는 최초로 100만장 이상 팔렸다. 그러나 발매 이듬해 ‘왜색이 짙은 음악을 금지해야 한다’는 일명 ‘왜색가요 시비’에 불이 붙으면서, ‘동백아가씨’를 비롯해 ‘기러기 아빠’, ‘섬마을 선생님’, ‘영등포의 밤’ 등의 노래에 방송 금지 조치가 내려지기도 했다. 가요에 대한 이 같은 금지 조치는 6·10 민주항쟁 이후인 1987년 8월 풀렸다.

■ 나훈아 ‘사랑은 눈물의 씨앗’(1969년), 남진 ‘님과 함께’(1972년)

1960년대 이후 트로트 시장은 나훈아와 남진의 경쟁으로 대변된다. 1968년 ‘내 사랑’으로 데뷔한 나훈아는 이듬해 낸 ‘사랑은 눈물이 씨앗’으로 톱스타 반열에 올랐다. 당시만 해도 촉망받는 신인 가수에 불과했던 나훈아는 이 노래 덕분에 1969년 연말 MBC 10대가수상을 수상했다. 남진은 나훈아보다 3년 빠른 1965년에 스탠다드 팝 계열의 ‘서울 푸레이보이’로 데뷔했다. 당시엔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해 가수 생활을 접으려고까지 했던 남진은 두 번째 음반에 실린 트로트곡 ‘울려고 내가 왔나’가 인기를 누리며 이름을 떨쳤다. 해병대 전역 이후, 그와 호흡을 맞췄던 작곡가 박춘석이 라이벌인 나훈아와 손을 잡고 히트곡을 쏟아내자, 남진은 또 다른 파트너 남국인을 찾아 ‘님과 함께’를 발표하며 다시 정상에 오른다. 영원한 숙적으로 꼽히는 만큼, 나훈아와 남진의 매력은 극과 극을 달린다. 나훈아가 향토적인 노래, 건장한 체구, 신비주의 전략으로 사랑받은 반면, 남진은 팝과 로큰롤을 흡수한 음악, 도회적인 이미지, 만능 엔터테이너로 활약했다.

■ 조용필 ‘돌아와요 부산항에’(1976년)

1970년대는 포크, 록, 소울, 발라드 등 음악 장르가 크게 확대되는 시기였다. 쎄시봉 출신 가수들의 명성이 최고조에 도달한 1973, 1974년에는 트로트가 눈에 띄게 위축됐다. 트로트의 부흥을 부른 노래는 조용필이 1976년 부른 ‘돌아와요 부산항에’다. 1972년 조용필 독집에 실은 곡을 리메이크한 곡으로, 당시로서는 세련된 고고리듬을 쓴데다가 가사도 일부 수정해 전혀 다른 느낌의 노래로 재탄생했다. 같은 해 조용필이 대마초 사건에 연루돼 활동을 중단했지만, 별다른 홍보 없이도 1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특히 이 곡은 재일교포들의 첫 고향 방문과 맞물리면서 국내는 물론 일본에서도 사랑받았다. 이후에는 최헌, 윤수일 등 록그룹 출신의 솔로가수가 록 사운드와 트로트 선율을 결합한 음악을 선보였고, 이런 경향은 198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다.

■ 주현미 ‘비 내리는 영동교’(1985년)

1980년대 중반 트로트를 둘러싼 왜색 논쟁이 재연되면서, 트로트의 인기는 또 다시 쇠퇴했다. 트로트에는 ‘일제강점기의 잔재’라는 주홍글씨가 붙었고, 일명 ‘뽕짝 메들리’라고 불리는 형식의 음반 정도가 트로트의 명맥을 이었다. 이런 메들리 음반 가운데 하나였던 ‘쌍쌍파티’에서 새로운 트로트 스타가 탄생했다. 1985년 발표한 ‘비 내리는 영동교’로 스타덤에 오른 주현미다. ‘비 내리는 영동교’는 급속한 개발과 맞물려 화려한 분위기를 풍기던 당시 서울 강남의 모습을 반영한 노래다. 주현미는 이 곡을 시작으로 ‘신사동 그 사람’, ‘짝사랑’ 등을 연이어 흥행시키며 이전까지 사랑받던 단조 트로트 대신 경쾌하고 밝은 장조 트로트가 유행하게 된 계기를 마련했다.  

■ 장윤정 ‘어머나’(2004년)

가수 심수봉이 단조 트로트의 명맥을 이었던 1980년대와 달리, 1990년대부터 트로트는 흥을 돋우기 위한 신나는 노래로 자리 잡았다. 태진아의 ‘옥경이’, ‘노란 손수건’, ‘미안 미안해’, 송대관의 ‘네 박자’, ‘차표 한 장’ 등이 대표적인 보기다. 2000년대부터는 젊은 트로트 스타들이 탄생하면서, 청년층도 즐길 수 있는 세미 트로트가 유행했다. 당시 ‘어머나’는 계은숙, 주현미 등에게 연달아 퇴짜 맞은 끝에 신인이었던 장윤정이 부르게 됐는데, 장윤정 역시 이 곡을 부르기 싫어 사흘 동안 울었다고 한다. ‘어머나’를 계기로 박현빈, 홍진영 등 젊은 트로트 스타들이 줄지어 탄생했고, TV조선 ‘내일은 미스(터) 트롯’의 엄청난 성공으로 송가인, 임영웅 등이 K팝 아이돌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게 됐다. 음악적으로는 댄스, 발라드, 심지어 EDM 등 다양한 장르와 퓨전을 거듭하며 새로운 ‘혼종’을 만들어내는 중이다.

wild37@kukinews.com / 사진=쇼플레이, KBS, 오아시스레코드사 제공 / 참고자료=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영미 집필), 한국 대중음악사 개론(서병기, 장유정 공저)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이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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