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사이’ 너의 아픔이 나를 부를 때 [TV봤더니]

‘달리는 사이’ 너의 아픔이 나를 부를 때 [TV봤더니]

기사승인 2020-12-30 07:00:03
▲ Mnet ‘달리는 사이’ 방송화면
[쿠키뉴스] 이은호 기자 =Mnet 예능 프로그램 ‘달리는 사이’의 다섯 주인공은 어딘가 모르게 다들 ‘과도’하다. 선미는 자신을 ‘과도한 책임감’으로, 청하와 츄를 각각 ‘과도한 지구력’과 ‘과도한 친절함’으로 설명했다. 10대 후반에서 20대 후반 사이에 데뷔한 이들은 일찍부터 견디고 버티는 법을 체득해야 했다. 선미는 말했다. “‘과도함’이라는 말만 빼면 다들 좋은 것들인데, 너무 과도해서 우리가 아플 수 있는 것 같아.” 그의 말을 듣던 청하와 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달리는 사이’는 20대 여성 아이돌들이 달리기 여행을 하는 과정을 그린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다. 선미·하니·유아·청하·츄는 산과 바다를 달리며 살아있음을 감각하고 자신들을 가로막는 것을 마주한다. 이들에게 달리기는 자신을 구속하던 압박으로부터의 해방되는 일이다. 하니는 달리기를 통해 숨이 차면 잠시 쉬어가도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선미는 자신만의 속도로 달리는 즐거움을 만끽했다. 청하는 달리기가 선두 다툼이 아님을 배웠고, 유아는 자신이 한계로 규정한 것을 뛰어넘는 용기를 얻었다.

다섯 여성의 달리기는 자신과 함께 달리는 이를 돌아보며 서로에게서 자신의 아픔을 보는 것으로 완성된다. 선미는 츄의 ‘과도한 친절함’을 알아보고, 하니는 청하의 ‘과도한 지구력’에 공감한다. 각자 겪은 사건은 조금씩 다를지언정, 품고 있는 고민이나 견디고 있는 압박은 다들 비슷하다. 남들보다 높이, 남들보다 빨리, 남들보다 완벽히…. 극한의 경쟁 속에서 단기간에 성과를 내야 하는 상황은 “계속 달려야 한다는 강박”(하니)을 낳는다. 아이돌을 육체적·감정적으로 착취하는 열악한 노동환경은 ‘꿈’이라는 단어를 만나 개개인의 열정과 노력으로 극복해야 할 과제로 치환된다. 비정상적인 시장구조가 개인에게 지운 과도한 책임감은 결국 그로 하여금 스스로를 갉아먹도록 만든다.

“멈추면 그 경기에서 퇴장해야 할 것 같은”(청하) 공포와 “(내가) 잘하는 게 없는 것 같은”(츄) 자책, “나쁜 구덩이가 파여 있으면 어떡하지”(유아) 하는 불안 사이에서 이어지던 여정은, ‘러닝 크루’라는 동행을 만나 적어도 외롭지는 않게 됐다. 비교적 경험이 많은 선미와 하니는 동생들에게 위로와 조언을 아끼지 않고, 동생들도 애정과 존경을 담아 언니들에게 보낸다. 서로 용기와 온기를 주고받는 러닝 크루들의 모습은 따듯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달리는 사이’와 하루 간격으로 방송되는 Mnet ‘캡틴’에서 10대 소년·소녀들은 여전히 경쟁에 시달리고 합격 배지에 울고 웃는다. 촉박한 시간 속에서 참가자들은 스스로를 ‘갈아 넣어’ 무대를 완성하고, 그 와중에 상대를 배려하는 훌륭한 인성이나 밝고 긍정적인 태도까지 보여줘야 한다. 심지어 이제는 참가자의 부모마저 민심의 평가 잣대가 됐다. ‘아이랜드’ 같은 오디션 프로그램에선 “잠 좀 줄여야 한다” “위험해서 안무를 못 하는 걸 이해해줄 시청자는 없다” 같은 말이 아무렇지 않게 나온다. 무엇이 ‘과도한 책임감’과 ‘과도한 친절함’과 ‘과도한 지구력’을 짜내게 만드는가. 호소가 호소에만 그치지 않도록, 이젠 만드는 이와 보는 이가 고민해야 할 때다.

wild37@kukinews.com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이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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