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김은빈 인턴기자 = 2012년 법전에서 사라진 ‘성범죄에 대한 친고죄’가 9년 만에 공론의 장에 올랐다. 정의당 대표가 같은 당 국회의원에게 자행한 성추행이 단초가 됐다. 사건이 공론화되는 과정에서 친고죄 폐지의 주축이었던 당 소속 피해 의원이 오히려 친고죄 부활을 주장하는 듯한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정의당은 지난달 25일 김종철 전 정의당 대표가 장혜영 의원을 성추행한 사실을 밝히며 당 내 절차에 의해 ‘무관용 원칙’으로 가해자를 처벌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사법체계를 통한 고소가 아닌 당내 조치로 사건을 마무리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심지어 제3자인 시민단체 활빈단이 김 전 대표를 성추행 혐의로 고발하자 “사법체계를 통한 고소를 진행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은 가해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저 자신을 위한 선택”이라며 제3자에 의한 형사고소에 대한 불쾌감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이후 피해자만이 신고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친고죄’의 폐지 취지를 무색하게 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은 “(공동체 내 해결은) 피해자 구제와 가해자 단죄에 한계가 있고 악용될 소지가 있다”며 “공론화를 택한 이상 우리 사회가 합의하고 법률에 명시된 성범죄 해법에 우선적으로 따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여성변호사회 인권이사로 활동 중인 서혜진 변호사는 오히려 다른 성폭력 피해자에게 메시지를 줄 수 있는 공인으로서 발언에 신중했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는 “성폭력 피해자 중 공동체적 해결이 가능한 경우는 거의 없다. 장 의원의 발언은 부적절하다. 정의당 같은 조직은 우리나라에 없다는 점에서 현실과 괴리감이 느껴지는 이상적 발언일 수 있다”고 비판했다.
당초 친고죄 폐지 주장의 핵심 근거 중 하나가 피해자와 가해자가 함께 속한 공동체 내 성범죄의 경우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합의를 종용하거나 위해를 가하는 등 2차 피해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집단 내 해결을 시사한 장 의원의 발언이 사회적 반감에 직면한 이유기도 하다.
◇ 친고죄 폐지 후 부활? 보완?… 전문가들 ‘개선’에 방점
일련의 논의과정에서 제도의 사각이 드러났다. 전문가들은 폐지 취지에는 공감한다고 입을 모았다. 다만 피해자 의사에 반하는 ‘제3자 형사고발’을 두고 갑론을박을 벌였다. 피해자 증언이 없으면 가해자 처벌이 어렵다는 점에서 수사과정에서의 문제점도 제기됐다.
임준태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친고죄 부활에 대해서는 미온적이었다. 그는 “사안이 심각해 개인의 의사보다 형사사법 정의가 더 중요한 경우 경찰이 나서서 수사할 수 있다. 다만 성범죄는 피해자가 공론화되는 걸 원치 않는다면 국가가 개인의 기본권 보호차원에서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친고죄 폐지로 피해자 진술이 없다면 증거수집이 어려운 건 애로사항이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피해자 의사를 존중하며 수사할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지 논의가 필요하다”고 보완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서 변호사는 제3자 고발이 당연하다면서도 피해자 의사를 존중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봤다. 그는 “현재 비친고죄지만 사건에서 피해자 의사가 영향이 큰 건 사실이다. 제3자 고발 시 2차 가해가 없는 선에서의 수사지침 마련이 필요하다”고 했다.
김정재 성폭력대책특별위원회 위원장도 “(폐지 취지와 같이) 피해자 의사에 상관없이 조사하도록 했는데 피해자가 오히려 권리를 침해당하는 상황이 생긴다면 공론화해서 논의할 필요가 있다”면서 “개정안이 나온다면 국민의힘 성폭력대책특위에서 논의해볼 수 있다”고도 전했다.
성폭력대책특위 위원이자 판사출신인 전주혜 의원도 법 개정보다는 수사기관의 자체적 기준마련에 무게를 실었다. 그는 “본인 의사에 반하는 일방적 고발은 명백한 2차 가해다. 이에 수사기관 스스로 각하하는 등 제도를 마련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하지만 정의당 사태가 친고죄 폐지문제로 호도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노선이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제3자 고발을 사법적 공백이라고 해석하긴 어렵다. 친고죄 폐지냐 부활이냐의 문제라기 보단 피해자 의사존중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법개정을 위한 움직임도 일부 감지됐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전문위원들은 현재 성범죄에 대한 친고죄를 놓고 내부검토에 들어간 것으로 파악됐다. 전문위원실 관계자는 “내부적으로 아직 협의 중인 사안이라 어떤 과정에 있는지 명확하게 말해줄 수는 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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