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8년 8월 평안북도 좌성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홍범도 장군은 유명한 포수였다고 한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병탄 될 위기에 처하자 1907년 포수를 모아 의병을 조직하고 수십차례 일본군과 격전을 치르며 무장독립운동을 펼쳐나갔다.
홍범도 장군은 '날으는 홍장군'으로 불리기도 하고 '축지법을 쓰는 신출귀몰 명장'으로 불렸다고 한다.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의병들은 산악지대를 자유자재로 누빈 포수들로 구성돼 산악 유격전에 유리했고 기동력도 일본군보다 월등히 우수해 이런 별칭으로 불린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대대적인 항일의병 토벌작전으로 홍범도 장군은 항일무장투쟁 무대를 간도와 연해주로 옮겼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홍범도 장군은 국내 진공 계획을 세운다. 일제는 월강추격대를 조직하고 독립군을 섬멸하려 했지만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연합에 의해 궤멸당한다. 이것이 유명한 '봉오동'대첩이다.
'봉오동' 대첩은 독립군 최초의 대규모 전투 승리였고, 독립군 사기를 크게 높인 독립전쟁이었다. 기록으로 전해지는 대한임시 정부 군무부 보고서에 따르면 봉오동 대첩에서 독립군 피해는 전사 4명, 중상 2명인데 비해 일본군은 전사 157명, 중상 200여명, 경상 100여 명이었다. 이후 홍범도 장군은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군과 함께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다시한번 대파한다.
홍범도 장군은 1937년 옛 소련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 정책으로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로 강제 이주 당했고 1943년 광복을 코 앞에 두고 향년 76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날 고국에 도착하는 홍범도 장군의 유해는 16~17일 국민추모기간을 보내고 18일 대전현충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eunsik80@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