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규 PD “과소평가된 목소리, 힘 실어주고 싶다” [쿠키인터뷰②]

이은규 PD “과소평가된 목소리, 힘 실어주고 싶다” [쿠키인터뷰②]

기사승인 2021-08-23 07:00:03
2020 도쿄올림픽에 참가한 여자 선수는 전체의 49%다. 여자 선수 비율이 절반에 다다르기까지 125년이 걸렸다.    KBS1 ‘다큐 인사이트’ 캡처.
[쿠키뉴스] 이은호 기자 =125년. 올림픽에 참가하는 여자선수 비율이 절반에 이르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서른두 번째 올림픽이었던 2020 도쿄올림픽은 참가 선수 중 여성의 비율이 49%에 달해 ‘성평등 올림픽’으로 주목받았다. 다양한 체형과 연령의 여성들이 뛰고 달리고 구르고 땀 흘리며 집중하고 포효하는 모습은, 그간 스포츠로부터 배제됐던 무수한 여성들에게 잊히지 않는 자국을 남겼다. 반면 언론과 방송사는 “얼음공주” “태극낭자” 등 여자선수의 ‘여성성’을 부각한 표현을 썼다가 질타 받았다. 관행처럼 반복하던 성차별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한 결과다.

KBS1 ‘다큐인사이트’ 국가대표 편을 만든 이은규 PD는 KBS가 모아둔 과거 방송 속에서 숱하게 되풀이된 성차별 역사를 끄집어냈다. 부끄러운 시대에 마침표를 찍는 심정이었을까. 이 PD는 “2016 리우올림픽 때만 봐도, 시민의식은 올라갔는데 방송사는 그러지 못했다. 이번 올림픽에서 KBS 중계가 호평 받을 수 있었던 건, 시청자의 비판에 공감하고 성찰했기 때문”이라고 봤다.

Q. 방송사의 관행적인 성차별을 성찰하는 방식으로 아카이브를 활용하셨습니다. 내부자로서 회사 선배들의 작업을 비판하기가 망설여지진 않았나요.

“그런 부담은 없었어요. ‘우리에게 이렇게 많은 아카이브가 있다’고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이 아카이브를 현재에 소환하면 어떤 효과가 난다는 걸 이미 많은 선배님들이 작업물을 통해 보여주셨거든요. ‘모던코리아’ 시리즈처럼요.”

Q. 말씀하신 ‘모던코리아’ 짐승 편은 온라인에서도 크게 화제가 됐죠. 서로의 작업을 보며 용기를 얻기도 하겠어요.

“저희가 활발히 교류하는 집단은 아닌데(웃음), 다른 사람이 만든 방송을 보며 감동받고 ‘나도 더 많이 이야기할 수 있겠구나’ 힘을 얻곤 해요. 자연스럽게 공영방송이란 뭔지를 고민하게 되고요.”

성폭력특별법 제정 당시를 조명해 호평받은 KBS1 ‘모던코리아’ 짐승편. 변영주 감독이 대학생 시절 여성이 겪는 고난에 관해 말하고 있다.  ‘모던코리아’ 캡처.
Q. 다시 국가대표 다큐멘터리로 돌아오면, 화면 구성이 스타일리쉬하다고 느꼈어요. 캡처해서 온라인에 입소문을 내기에도 좋고요.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많이 볼까를 고민한 결과예요. KBS라는 브랜드가 고루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시잖아요. ‘우리 그렇지 않다. 젊고 트렌디한 방송,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웃음)”

Q. 젊은 방송을 지향하려는 쇄신이 있었나요.

“그렇다기보다는 꾸준히 신입 시사교양PD들이 들어온 영향이 큰 것 같아요. 젊은 PD들은 ‘2030도 수신료 내는데, 왜 그들을 위한 다큐멘터리는 없냐’고 목소리를 냈고, 위에서도 그런 고민에 공감하며 기회를 줬어요. 한편으론 젊은 시청자를 위한 아이템을 다큐 고정 시청자인 60대 남성에게 무리 없이 전달할 방법도 고민하고 있어요. 그들을 납득시키고 설득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죠. 그게 수신료로 만드는 공영 콘텐츠의 역할이라고 봐요.”

Q. 여성의 이야기를 조명한 다큐멘터리가 많아진다는 점이 고무적입니다.

“우선 또래 여성 PD들이 많아졌어요. 그리고… 20대, 30대 여성이 공영방송에서 다큐멘터리PD가 되겠다는 마음을 품은 데는, 삶에서 어떤 중요한 순간을 마주친 영향이 있겠죠. 그런 목소리는 앞으로 더 많이 나올 것 같아요. 또, 각자 자리에서 고군분투하는 선배들이 있었기에 서로 힘을 주는 분위기가 만들어졌어요. 가령 개그우먼 편을 만들며 ‘이게 될까’ 고민했는데, KBS스페셜에서 젠더 관련 다큐를 만들었던 선배가 ‘일단 예산부터 받으라’는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셨죠.(웃음) 요즘엔 외부에서도 ‘최근 KBS 여성 PD들은 다르다’는 평가가 나온다고 해요.”

Q. 지금 20대, 30대 여성들에겐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시작한 페미니즘 리부트 운동이 큰 영향을 줬을 거라고 생각해요. PD님이 여성 서사에 주목하시게 된 계기나 PD님을 고취시킨 사건이 있었나요.

“제게도 강남역 살인사건이 컸어요. 한 개인으로서, 또 창작자로서 그 일 이후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달라졌어요. 그 전까지는 인권, 민주주의, 같은 큰 단어에 집중했다면 그 다음부터는 여성의 삶을 많이 생각하게 됐습니다.”

Q. 영화도 공부하셨다고요.

“대학원에서요. 다큐멘터리를 만들려고 KBS에 입사했는데 막막했어요. 사람들이 많이 안 보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더 잘 만들 수 있을지는 모르겠고. 다른 일을 해볼까 하며 영화 시나리오를 공부하다가 재작년에 학업휴직까지 하며 공격적으로 배웠죠. 그런데 해보니 더 어려워서 따듯한 회사로 돌아오게 됐습니다.(웃음) 다만 그 때 배운 내러티브 만들기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데도 도움이 돼요.”

배우 윤여정의 연기 인생을 조명한 ‘다큐 인사이트’ 윤여정편.  ‘다큐 인사이트’ 캡처.
Q. 다큐멘터리의 매력은 뭔가요.

“사실이 주는 힘이 큰 것 같아요. 영화나 드라마, 예능은 유명인이 발휘하는 힘이 크잖아요. 그런데 다큐멘터리는 제작자가 사실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중요하거든요. 그래서 고민할 지점이 많아지지만 거기에서 오는 즐거움도 큽니다.”

Q. 다큐멘터리 제작자에겐 어떤 역량이 필요할까요.

“저는 목적의식이 분명한 사람이었어요. 어떻게 하면 더 화제성을 만들지를 생각하며 살았는데(웃음) 요즘엔 조심하게 돼요. 출연자가 속았다고 느끼지 않는 다큐, 카메라에 담긴 피사체가 ‘참여한 시간이 아깝다’고 느끼지 않는 다큐를 만들고 싶어요. 다큐멘터리 감독 출신인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어떤 다큐멘터리는 인터뷰를 이용해서 방송을 만든다. 그것만은 경계했다’고 말했어요. 저 역시 그러지 않으려고 조심하고 있습니다.”

Q. 필요한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존재가 있나요.

“사실 저는 단순한 감정으로 해나가고 있어요. 30대 여성인 제가 관심 가질 수 있는 이야기, 제 또래 친구들이 공감하면서 힘을 얻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이거야말로 이 시대가 공유해야 할 공영 콘텐츠 아닌가’ 하는 마음으로 일하고 있어요.”

Q. 공영방송의 책임을 무겁게 느끼시나 봅니다.

“수신료 전사 같죠?(일동 웃음) 공영방송은 이 시대에 필요한 가치와 질문을 공유해야 한다고 봐요. 그동안 과소대표 되어 목소리가 적게 반영된 분들을 들여다보고, 그분들에게 확성기를 대주는 게 공영방송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과거엔 그 대상이 ‘약자’ ‘소수자’였다면, 요즘은 좀 더 구체화된 개인, 당사자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 같아요.”

Q. 이 시대에 필요한 질문은 뭘까요.

“정말 고민이에요. 뭘까요, 그게. 다만 그런 건 있어요. 살아가면서 선택의 순간을 맞닥뜨렸을 때, 내 삶에 좀 더 밀착해서 다가올 만한 고민을 구체적으로 건드리고 싶어요. 작은 이야기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삶에 와 닿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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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d37@kukinews.com
이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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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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