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 송장 번호 지우기, 현관에 남자 신발 놓기, 육각 자물쇠에 이중창까지. 홀로 사는 여성의 현주소다. 불안에 떠는 여성 1인가구를 위해 매일같이 피켓을 들고 아침을 여는 사람이 있다. 이나리 정의당 광진구위원장이다.
겨울비가 매섭게 오던 지난 8일. 출근 인파로 북적이는 건대입구역 1번 출구에서 이 위원장을 만났다. 이 위원장은 ‘광진구 여성1인가구 안심조례 제정’을 위해 발로 뛰고 있다.
이 위원장은 지난 7월부터 매일 지하철역 앞에서 1인 피케팅을 하고 있다. 비를 뚫고 출근길을 재촉하던 사람들도 이 위원장의 피켓에 눈길을 보냈다. 그가 든 피켓에는 ‘여성1인가구 안심조례가 필요합니다’라는 문구가 담겼다.
이 위원장은 15년째 광진구 화양동에 살고 있다고 했다. 지난 7월 통계청이 발표한 ‘2020년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광진구는 서울시에서 1인가구 비율이 4번째(41.0%)로 높은 자치구다. 광진구 화양동의 경우 1인가구 수가 79.11%에 이른다.
그럼에도 지역사회는 여성 1인가구 안전 문제에 미온적이었다. 이에 이 위원장은 여성 1인가구 당사자로서 나서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여성 1인가구 안전 문제를 절박하게 느끼는 정치인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여성 1인가구 안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로 “지역사회에서 이 문제에 목소리를 내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누군가가 마땅한 위치에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 위원장은 홀로 사는 여성들이 겪는 정신적·물질적 어려움에 대해 토로했다. 그는 여성 1인가구가 자신의 안전에 대해 반쯤 체념한 상태였다고 전했다. 지난 2019년 발생한 ‘신림동 강간미수 사건’과 같은 주거침입 범죄가 끊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 위원장은 “여성들은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만으로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미래를 논하겠나”라고 말했다.
‘안전 비용’ 문제도 지적했다. 여성 1인가구는 안전을 위해 남성보다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한다는 지적이다. 이 위원장은 자신의 집에 택배 송장을 처리하기 위한 ‘파쇄기’가 있다고 했다. 10만원 정도 되는 파쇄기를 구매하면서 “안전 때문에 파쇄기를 사는 남성이 있을까 싶어 자괴감이 들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여성 1인가구에게 ‘택배 송장’은 일종의 트라우마가 됐다. 지난 3월 노원구 세 모녀 살인사건 피의자인 김태현(25)이 피해자의 SNS 사진 속 택배 송장 주소를 통해 사건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사건 이후 인터넷을 통해 알코올 물파스·향수 등을 써 택배 정보를 삭제하는 방법이 공유됐다. 택배 송장 전용 지우개, 스탬프 등도 판매되고 있다.
이 위원장은 더 실효성 있는 여성 1인가구 안전 대책 마련을 위해 조례 제정이 시급하다고 촉구했다. 많은 지자체에서 여성 1인가구 안전 사업을 시행 중이지만, 대부분 단발성·소규모 사업에 그친다는 지적이다. 그는 “현재 여성 1인가구 안전 전담 부서가 없는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며 “조례가 만들어지면 현재 중구난방식인 여성 1인가구 안전 문제를 통합 관리할 수 있는 부서와 예산을 편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 위원장에 따르면, 조례가 통과될 시 △주민자치센터, 경찰서, 상담소 등을 연결해주는 여성안전 핫라인 구축 △1인가구 밀집지역 마을경비원 제도 상시 운영 △젠더폭력예방 교육 및 홍보사업 확대 등 사업을 추진할 수 있다. 여성 1인가구 안전을 위한 보다 실질적인 활동을 펼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당사자인 1인가구 여성의 역할도 강조했다. 여성 1인가구 사회관계망을 구축해 지역사회에 지속적으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관악구는 여성 1인가구 자발적 소모임인 ‘우리동네여성, 안전모꼬지’를 운영 중이다. 지역 여성 1인가구가 상호교류를 통해 지지 체계를 만들 수 있도록 한다는 취지다.
이 위원장은 “조례 제정에 있어서 무엇보다 당사자인 여성 1인가구의 목소리가 중요하다”며 “여성 1인가구 네트워크를 통해 생긴 힘으로 조례가 제정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민경 인턴기자 medsom@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