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87]
글로벌 성 평등 지수 0.687. 156개국 중 102위. 한국은 완전한 평등에서 이만큼 멀어져 있다. 기울고 막힌 이곳에서도 여성은 쓴다. 자신만의 서사를.
기억하니. 동아리에서 처음 만났던 날. 첫눈에 서로에게 반했지. 너는 내 모든 일상을 공유한 베스트 프렌드였어.
행복이 깨진 건 언제부터였을까. 시작은 사소한 간섭이었어. 너는 곧잘 이런 말을 했지. “넌 내 거야, 아무 데도 못가.” 진한 화장을 하지 말라고 얘기했지. 짧은 치마를 입지 말라며 옷차림 단속도 했어.
다음은 인간관계 통제였어. “남자랑 술 마시지 마.”, “걔랑 만나지 마.” 늘 내게 하던 말이었잖아. 처음에는 나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생각했어. 그렇지만 반복하는 의심과 싸움이 힘들어지더라.
참다못해 이별을 말한 날이 떠올라. 너는 받아들이지 못했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헤어질 수 없다고 했어. 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우리를 쳐다봤지. 두려웠어. 내 손목을 거칠게 잡아끌던 너의 모습이 잊히지 않아. 그날 내 손목에는 파란 멍 자국이 찍혔어.
그렇게 지옥이 열렸어. 하루 수십 번에 달하는 전화는 아무것도 아니었어. 문자, 카카오톡, 이메일, 페이스북 메시지까지. 넌 연락할 온갖 방법을 동원했지. 심지어 은행 계좌 알림마저 울렸어. 몇백원, 몇천원씩 돈을 보내며 입금자 란에 소름끼치는 메시지를 썼잖아. “제발 돌아와.”, “다시 시작하자.”
아무리 싫다고 말해도 달라지지 않았어. 전화번호를 바꾸고, 모든 SNS 계정을 탈퇴해도 소용없었어. 나중에는 벨 소리만 들려도 온몸이 덜덜 떨리더라. 눈에 띄게 수척해진 내 모습에 주위 사람들이 안부를 물었어.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
처음 알았어. 혼자 걷는 밤길이 그렇게 무섭다는 걸. 어디선가 네가 날 보고 있는 게 아닐까. 우리 집 앞에 있는 배드민턴장 기억나니. 수업을 마치고 돌아가던 날, 검은 모자를 쓰고 벤치에 앉아있는 남자가 보이더라. 쿵쿵. 심장이 곤두박질쳤어. 그날 나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어. 30분을 돌아 집에 갔어.
자취 집을 정리하고 본가로 옮겼어. 하지만 끝이 아니더라. 너는 그림자처럼 날 따라왔지. 내가 사는 집을 어떻게 찾았을까. 넌 내가 몇 시에 집을 나서고 몇 시에 들어오는지도 알고 있더라. 내 가족과 친구의 연락처까지. 무작정 집으로 찾아와 대문을 두드리기도 했지. 난 말이야, 네가 이렇게 변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어.
결국 경찰을 부를 수밖에 없었어. 우리 사이에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는 꺼내고 싶지 않아. 나는 안도했어. 길고 긴 싸움이 끝났다는 생각에.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그게 아니더라.
네가 언제 나타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쫓겨. 상담 치료도 받아. 1회 10만 원. 네가 남긴 흉터는 꽤 오래가더라. 병원에서 한창 울고 나오면 괜찮아지나 싶었는데. 작은 전화벨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라는 내 모습을 발견해. 뉴스에 전 남친 범죄가 보도될 때마다 무서워.
내 친구들도 비슷한 말을 하더라고. 아름다운 이별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대. 그저 보복당하지 않기를, 무사히 안전이별을 할 수 있기를 빌 뿐이야.
젊은 연인이 만나고, 헤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텐데. 나는 그저 헤어지자고 했을 뿐인데. 앞으로 내가 누군가에게 온전히 마음을 열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까.
최은희 기자 joy@kukinews.com
*기사는 20대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취재 내용을 각색해 편지 형식으로 구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