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 지나간 자리, 동해에 남은 건...

불이 지나간 자리, 동해에 남은 건...

기사승인 2022-03-10 16:59:06
강원 동해시에 번진 산불로 묵호항을 내려다보던 카페가 전소했다.   사진=정진용 기자 
봄바람엔 매캐한 연기가 섞여 있었다. 아린 내가 마스크를 뚫고 들어왔다. 목에서는 기침이,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10일 오전 강원 동해시 어달동 하늘에는 여전히 재가 날았다.

산불이 휩쓴 자리. 검은 상흔은 넓고 깊었다. 소나무로 울창했던 숲은 민둥산이 됐다. 까맣게 탄 논밭 한쪽에는 미처 불을 피하지 못한 동물 사체가 있었다. 마을 곳곳에는 그날의 긴박한 상황을 보여주듯 소화기가 굴러다녔다. 농부의 손과 발이 됐던 경운기는 녹아내렸다.

지난 5일 강릉시 옥계에서 시작한 불은 90시간 만에 강릉시 1900ha, 동해시 2100ha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주불은 지난 8일 저녁에야 잡혔다.
강원 동해시에서 만난 산불 피해를 입은 주민. 불에 타 사라진 시설 재건은 여든 노인의 몫이다.    사진=민수미 기자 
불에 타 사라진 울타리를 다시 세우려는 여든 노인의 손은 바빴다. 우복성(82)씨는 이 지역에 난 산불로 밭에 세운 비료 창고와 울타리가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다. 아들, 딸이 달려와 불이 넘어오지 않도록 물을 끼얹은 덕분에 간신히 밭은 지켰다. 딸의 집으로 몸을 피했다가 돌아온 그는 여전히 살아있는 불씨를 봤다. 노부부는 급한 대로 손으로 흙을 퍼 불을 꺼야 했다. 우씨는 “이곳에 50년 살면서 이렇게 큰불은 처음”이라며 “비료와 장비 모두 다 타버려서 어떻게 농사를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막막하다”고 토로했다.
지난 5일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보여주듯 마을 곳곳에 소화기가 굴러다녔다.   사진=정진용 기자

화마가 마을을 덮친 지난 5일, 주민 우모씨의 대피 길은 말 그대로 전쟁이었다. 거센 불길과 몰려든 차량 탓에 2시간 넘게 도로에 갇혀있어야 했다. 평소 10분이면 될 거리였다. 같은 날 택시기사 이영근(59)씨가 가족을 데리고 집을 뛰쳐나온 시간은 오후 2시. 한낮에도 비상등을 켜지 않으면 앞이 보이지 않았다. 흰 연기와 재가 하늘에 가득 찼다.

불에 타 녹아 내린 경운기.   사진=정진용 기자
펜션 난간에 붙은 불을 보고도 도망가야 했던 나의준(33)씨의 목소리는 잠겨있었다. 이곳 사장인 그는 슬금슬금 올라오는 검은 연기에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고 말했다. 임시방편으로 펜션 주변에 물을 뿌리던 나씨. 멀리 보이던 불은 바람 한 번에 눈앞까지 닥쳤다. 나씨는 “손님들을 챙길 여력이 없어 일주일 동안 쉬고 있다”며 “이 기간 예약했던 손님들에게 환불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화재로 뼈대만 남은 카페 건물. 근처 주택도 피해를 입었다.   사진=정진용 기자
이달 말 망상 해변 앞 펜션 개업을 앞두고 있었던 박모(45)씨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열 달 동안 준비해오던 일이었다. 박씨는 “탄내가 심해 손님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며 “창을 열 수도 없어 공기청정기만 돌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 사업은 풍경도 중요한데 주변 숲이 잿더미가 됐다”며 “언제 문을 열 수 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묵호항을 내려다보던 카페는 이번 불로 전소됐다. 불똥은 근처 주택에도 튀었다. 기둥과 터만 남아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이만우(64)씨는 “전망이 좋아 해돋이를 보러 오곤 했는데 마음이 아프다”고 말끝을 흐렸다. 안타까움에 터져 나온 주민들의 한숨이 마을을 채웠다.

동해=민수미, 정진용 기자 min@kukinews.com
민수미 기자
min@kukinews.com
민수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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