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산: 용의 출현’(감독 김한민)에서 이순신은 말수가 적다. 꼭 필요한 순간이 아니면 입을 꾹 다문다. 말보다 행동으로, 자신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장수. 이순신을 연기하는 배우 박해일은 순간의 눈빛과 표정으로 관객을 설득한다. 말로 다 하기 힘든 고뇌와 승리를 향한 갈망, 그리고 동료 장수들을 생각하는 선한 마음을 눈에 담아 전달하려는 것처럼.
전작 ‘명량’보다 더 과거로 돌아갔다. ‘한산: 용의 출현’(이하 ‘한산’)은 이순신 장군이 활약한 초기의 한산도 대첩을 다룬 영화다. ‘명량’과 ‘한산’ 이순신의 노년을 그린 ‘노량’까지 김한민 감독은 이순신을 연기한 배우를 모두 다르게 선택했다. ‘한산’에선 데뷔작 ‘극락도 살인사건’과 ‘최종병기 활’에서 함께한 박해일을 내세웠다. 영화 개봉 전인 지난 21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배우 박해일은 이순신 장군이 쓴 시를 곧은 자세로 읊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인간 이순신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이순신 장군님도 어마어마한 스트레스가 있으셨겠죠. 그럴 때 장수들과 병사들을 불러서 술 한 잔 했다고 해요. 그럴 때 마다 꼭 비가 왔다고 하더라고요. 아니면 밤에 나가서 보이지도 않는 과녁에 활을 50발, 100발씩 땀이 흠뻑 젖도록 쐈다고 하고요. 마음을 다스리는 거겠죠. 그것도 안 되면 글을 쓰셨나 봐요. 전투를 지휘하는 수장이 글을 썼다는 건 인상적이에요. 수십 년 전부터 이순신을 다룬 드라마, 영화, 저서가 있어요. 그때마다 시대가 바라는 면을 더 부각시켰다고 봐요. ‘한산’ 속 이순신은 감성적인 면이 있어요. 그게 지금 시대와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죠. 감독님이 ‘한산’의 전투를 ‘명량’과 다른 결로 보여주자고 하시면서, ‘한산’의 이순신은 수양을 많이 쌓은 선비 같다고 했어요. 그 말이 저에게 깊숙이 들어왔습니다.”
박해일은 자신이 잘 못하는 연기가 있다고 했다. 감정이 과잉된 연기였다. 어떻게 보여주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감정을 너무 드러내는 걸 경계하고 싶었다. 언제나 절제하면서 기운 있는 연기 톤을 만들고 싶었다. 촬영 때마다 그 연기 톤이 느껴지는지 자주 물었다. ‘한산’에선 더 자주 물었다.
“감독님과 절제하는 방식으로 연기해보자고 얘기했어요. 많은 작품을 하면서 여러 방식으로 인물을 보여줬어요. 말을 많이 하는지, 감정을 드러내는지는 작품에 따라 결정해요. ‘한산’에선 최대한 절제하려고 했어요. 대사가 적어도 한 마디, 한 마디에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기운을 실어서 날려보자고 생각했죠. 어려운 방식이라 생각해요. 그 기운을 잘 전달하지 못하면, 연기를 안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거든요. 대사는 배우가 관객에게 감정을 전달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에요. ‘한산’에선 얼굴을 비추는 몇 초 안에 감정을 눈빛으로 보내야 했어요. 얼굴도 아니면 서 있는 자세 하나로 대사처럼 상황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을 연기하는 일에 부담이 컸다. 긍정적인 면을 많이 생각하려고 했다. 두 편의 영화를 함께 했고 사적인 자리에서도 만나는 김한민 감독이 자신의 기질을 잘 끄집어내줄 거란 믿음, 그리고 촬영 환경이 좋지 않았던 ‘명량’ 때부터 함께 경험을 쌓은 스태프에 대한 믿음이었다. ‘명량’에서 이순신을 연기한 배우 최민식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촬영하고 있다는 안도감에 기대려고 했다. 그럼에도 역사 속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로서 간극을 느끼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이순신 장군님은 흠결이 없잖아요. 물론 연기를 하면 돼요. 하지만 저와 장군님의 간극을 놔두고 연기하기엔 뭔가 거짓말 같았어요. 연기할 땐 잊고 싶었지만, 흠결 자체인 제가 이순신을 연기한다는 생각을 떨치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촬영 전에 ‘난중일기’를 볼 수 있을 만큼 계속 봤습니다. 촬영할 땐 콘티와 시나리오를 봤고요. 두 가지를 보지 않을 땐 많이 걸었어요. 그분은 활을 쏘셨지만, 난 활을 쏠 수 없으니 걸어보자고 생각했어요. 잡념을 제거하려고 강릉과 여수 일대를 많이 걸었습니다.”
완성된 ‘한산’을 처음 본 박해일은 해상 전투 장면의 CG를 인상 깊게 봤다. 제작진이 많은 예산을 써서 오랜 시간 공들인 작업의 결과물이었다. 배우들도 눈에 들어왔다. 이순신과 함께 조선 수군을 이끈 배우 안성기와 공명을 비롯해 일본어로 연기한 배우들, 조선 수군과 의병 배우들, 처참하게 전사하는 단역 배우들까지. 생각해보면 이상할 정도로 모두가 소명의식을 갖고 촬영한 현장이었다. 모두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를 조심하던 더운 여름날, 반복되는 고된 과정을 차분하게 버틴 날들이었다.
“관객들이 ‘한산’을 많이 보셨으면 좋겠어요. 사실 제가 지금 인터뷰하는 순간에도 이순신 장군님을 얘기하는 것조차 버겁고 조심스러워요. 관객수를 어느 정도로 예상하냐고 물어도 감이 오지 않아요. 그런 말을 할 입장도 아닌 것 같고요. 올해 여름은 ‘한산’을 포함한 대작 한국영화들이 연이어 관객들을 만나잖아요. 다시 팬데믹 전처럼요. 관객들이 극장에서 여름에 어울리는 다양한 색깔의 작품을 재밌게 즐겨주셨으면 하는 바람뿐입니다.”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