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남자’라는 말에 기분 좋을 줄 몰랐어요.” 지난달 30일 서울 청담동 한 카페에서 만난 배우 김병철은 이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에게 ‘하남자’(상남자의 반의어이자 지질한 남자를 일컫는 신조어)라는 별명을 선사한 작품은 JTBC ‘닥터 차정숙’. 극 중 차정숙(엄정화) 남편 서인호 역을 연기했다. 그의 외피는 존경받는 의사이나 실상은 다르다. 자녀의 꿈을 존중하지 않고 의사만을 강권하는 데다, 헌신적인 아내를 뒤로 한 채 첫사랑과 불륜 관계를 지속한다. 그럼에도 긍정적인 시청평이 나온다. 김병철은 “욕먹으리란 각오로 임했지만 좋은 반응이 나와 어리둥절했다”고 돌아봤다.
좋지 않은 평가가 잇따를 수밖에 없는 역할이다. 서인호 역할은 캐스팅에 난항을 겪은 것으로 유명하다. 부도덕한 짓을 저지르면서도 유쾌하고 코믹하며 두 여자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매력을 보여줘야 해서다. 김병철은 이 모든 부담을 감수하고 ‘닥터 차정숙’에 뛰어들었다. 그만큼 작품이 재미있었단다. 김병철이 가부장적인 인물을 맡은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5년 전 그가 연기한 JTBC ‘스카이캐슬’ 차민혁은 자녀들에게 원하는 진로를 강요하고 아내를 강압적으로 대하는 인물이다. 그는 “차민혁이 권위적이고 폭력성이 짙었다면 서인호는 가스라이팅(심리지배)하듯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끈다”고 짚으며 “여성관계가 복잡하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라고 말했다.
부정적인 모습을 가졌어도 재미난 면을 연기할 수 있다는 점은 그의 도전정신을 자극했다. 서인호를 밉지만은 않게 표현하는 게 목표였다. 조금이라도 웃음기 섞인 장면은 차지게 살리려 했단다. 자잘한 아이디어까지 모으고 모아 지금의 서인호가 탄생했다. 그의 노력 덕에 시청자 사이에선 어느샌가 ‘밉지만 귀엽다’는 반응이 나왔다. 비결을 묻자 “대본에 충실했다”는 정석 답변이 돌아왔다.
“서인호는 때때로 우스꽝스러워요.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지거나 정숙에게 뺨을 맞고 어리둥절한 얼굴로 잠에서 깨죠. 대본에 ‘넘어진다’로만 적힌 지문을 조금씩 구체화하곤 했어요. 방에서 나가다 일부러 휘청댄다거나, 침대에서 내려오다 미끄러지는 모습 등이 그래요. 그 상황 속 서인호라면 익히 그러리라 생각했거든요. 박준금 선배님에게 베개로 얻어맞거나, 민우혁 님과 춤을 추는 장면도 즉흥적으로 합을 맞춘 게 많아요. 대본을 구체적으로 파고들수록 좋은 장면이 나와요. 이게 연기의 맛이죠.”
김병철은 서인호를 우유부단한 인물이라 설명했다. 정숙과 결혼, 승희(명세빈)와 불륜 모두 “우발적으로 벌어진 상황에 자아 없이 끌려 다닌 결과”여서다. 반면 본업인 의사 일에선 냉철한 전문가다. 아들 정민(송지호)이 위기에 처하자 모든 걸 총동원해 보호하려 나서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분명 나쁜 사람이지만 내 편일 땐 듬직하다는 반응이 나왔을 정도다. 김병철은 이런 장면을 “서인호의 지질함을 만회할 기회”로 봤다. 덕분에 서인호는 미워할 수만은 없는 인물로 재탄생했다. 서인호는 마지막에 다다라서야 개과천선한다. 불륜을 저질렀음에도 구산병원 최연소 병원장으로 올라서는 등 승승장구한다. 흔히 말하는 ‘사이다’(속 시원한 결말을 일컫는 표현)와는 다르다. 김병철은 마지막 회 대본을 받고 생각에 잠겼다고 한다. 그가 해석한 결말의 의도는 이랬다.
“이혼 후 3개월 만에 갑자기 병원장이 된 건 저 역시 놀라웠어요. 작가님께 여쭤보진 않았지만, 혼자 생각해서 내린 결론이 있어요. 현실을 반영한 거죠. 서인호가 모든 걸 잃었다면 좀 더 통쾌하긴 했을 거예요. 하지만 현실에서도 불륜을 저지른 남성이 사회적으로는 망하지 않는 경우가 있잖아요. 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 그래도 서인호가 인격적으로 어느 정도는 성장한 것 같아 좋아요. 물론 보는 분에 따라 인호의 결말이 부족할 수도, 좋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tvN ‘미스터 션샤인’과 ‘스카이캐슬’, ‘닥터 차정숙’에 이르기까지, 김병철의 출연작 다수가 좋은 성적을 거뒀다. 조연에서 주연으로 발돋움한 ‘닥터 차정숙’의 흥행은 그에게 새로운 책임감을 심어줬다. 김병철은 “책임감과 비례해 부담감이 커졌다”면서도 “좋은 결과 덕에 걱정들이 사라졌다”며 다행이라 말했다. “‘닥터 차정숙’으로 멜로 욕심이 생겼다”며 주먹을 불끈 쥐는 그의 얼굴엔 행복감과 설렘이 완연했다.
“매번 작품을 이끌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일이란 게 늘 그렇듯, 이번 작품은 주연이어도 다음에는 다시 비중이 작아질 수 있잖아요. 하지만 ‘닥터 차정숙’ 덕분에 새로운 욕심이 생겼어요. 본격적인 중년 로맨스도 나오면 좋지 않을까요? 안방극장에 수요만 있다면, 저 같은 연기자도 좋지 않을까 주장해봅니다. 하하. 너무 잘나지도 않았고, 평범하게 이입하기 ‘딱’이잖아요. ‘파국’에서 ‘하남자’까지 왔으니, 다음 작품에선 어떤 수식어를 얻을지 기대돼요.”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