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대신 가족 지키는 ‘소시민 초능력자’

지구 대신 가족 지키는 ‘소시민 초능력자’

기사승인 2023-09-01 06:00:25
‘무빙’에서 장주원을 맡은 배우 류승룡.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전쟁터에서 총에 맞고도 끄떡없던 남자는 아내의 영정사진 앞에서 무너진다. 눈에선 눈물이 후두두 쏟아지는데 말투는 애써 차분하다. “나 왔어. 걱정 마. 희수 내가 잘 키울게.” 지난달 30일 공개된 디즈니+ ‘무빙’ 12화 속 한 장면. 나라에 헌신하라는 조직의 명령에 충성하던 장주원(류승룡)은 아내가 죽은 뒤 딸 희수(고윤정)에게 일생을 바친다. 아무리 다쳐도 금세 회복되는 그의 초능력은 이념이나 단체가 아닌 가족을 지키는 데 쓰인다.

소시민의 얼굴을 한 초능력자가 요즘 안방극장에서 인기다.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한 ‘무빙’은 하늘을 나는 김두식(조인성), 오감이 극도로 발달한 이미현(한효주), 신체 재생 능력을 지닌 장주원, 괴력과 초스피드를 발휘하는 이재만(김성균) 등 초능력자들과 그 가족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주말엔 악귀에 맞서는 초능력자(tvN ‘경이로운 소문2: 카운터 펀치’)와 손으로 타인의 기억을 읽는 수의사(JTBC ‘힙하게’)가 시청자를 찾아가고, 주중엔 거짓말을 탐지하는 무당(tvN ‘소용없어 거짓말’)이 안방 문을 두드린다.

능력도 성격도 제각각인 이들에게도 단 하나 공통점이 있다. 휴머니즘이다. ‘무빙’ 속 초능력자들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정체를 감춘 채 살아간다. 미국 FBI에 소속된 프랭크(류승룡)는 초능력자들을 제거하고 그 자식들을 찾으라는 상부 지시에 한국을 찾지만, 그가 만난 부모들은 죽음을 불사할지언정 자식의 행방엔 입을 다문다. 한때 국정원 최정예 요원이었던 김두식도 아들 봉석(이정하)이 목숨 같긴 마찬가지. 그는 아내 이미현과 아들을 먼저 피신시키며 말한다. “우리 봉석이는 나 같은 인생을 살게 할 순 없어요. 어떻게든 감춰야 해요.”

‘무빙’ 스틸.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원작 웹툰과 드라마 대본을 모두 집필한 강풀 작가는 최근 서울 화동 한 카페에서 쿠키뉴스와 만나 “‘무빙’은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원작 구상 당시부터 “한국형 히어로”를 만들고 싶었다는 그는 “‘무빙’엔 마블 같은 재벌(아이언 맨)이나 신(토르)이 나오지 않는다. 싸우는 목적 역시 국가나 지구를 구하려는 게 아니다. 그들은 단지 가족과 이웃 등 주변 사람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고 비교했다.

다른 초능력자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경이로운 소문2: 카운터 펀치’는 가족을 잃은 분노로 악귀가 된 ‘소방 영웅’ 마주석(진선규)과 그를 도우려는 소문(김병규)의 대립을 비춘다. ‘힙하게’에선 사이코메트리 능력을 지닌 봉예분(한지민)이 연쇄 살인사건을 추적하며 이웃을 돕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소용없어 거짓말’의 초능력자 목솔희(김소현)는 인격 살인을 당한 작곡가 김도하(황민현)를 만나 사랑과 믿음을 재정의하며 성장한다.

초능력자들의 활약은 한동안 계속될 전망이다. JTBC는 괴력을 타고난 3대 모녀가 범죄를 파헤치는 ‘힘쎈여자 강남순’을 다음 달 7일부터 방송한다. 내년엔 우울증에 걸려 초능력을 잃은 복씨 가족을 그린 ‘히어로는 아닙니다만’도 선보인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최근 등장하는 히어로물 주인공들은 완성형 초능력자가 아니다. 결핍 속에서 능력을 연마하고 다른 사람들과 연합해 문제를 해결하는 성장형 캐릭터가 대부분”이라며 “공동체의 문제 해결 능력이 약해진 현실을 타개하고 싶은 대중의 소망이 초능력 히어로에 투영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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