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약자석 못 앉는 약자들…“학생 앉을 곳 아냐” 발길질도

교통약자석 못 앉는 약자들…“학생 앉을 곳 아냐” 발길질도

기사승인 2023-10-19 06:00:02
픽토그램으로 안내된 서울 지하철 교통약자석. 사진=유민지 기자


# A씨(30)는 매일 진단서를 들고 지하철 교통약자 배려석(교통약자석)에 앉는다. “여긴 학생 앉을 곳이 아니다”, “멀쩡해 보이는데 비켜라”는 말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다. A씨는 철 결핍성 빈혈로 종종 열차에서 쓰러지곤 했다. 눈앞이 까맣게 되고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교통약자석에 잠시 발을 붙이고 싶어진다. 하지만 A씨는 “교통약자석에 앉았다는 이유만으로 임신해서 여기 앉았느냐는 말부터 부모님 욕에 발길질까지 당했다”며 “그곳에 서면 늘 작아진다”고 말했다.

대중교통 내 교통약자석이 원래 취지와 달리 고령자석으로 굳어져 제 역할을 못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전문가는 ‘한국의 동방예의지국 정서’와 ‘공정을 중시하는 세계 흐름’ 사이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고 분석했다.

교통약자석은 지난 1980년 서울지하철 출범 당시 경로 우대를 강조하던 사회 분위기에서 ‘노약자 지정석’으로 만들어졌다. 40년 동안 명칭 변경을 거듭한 끝에 2007년 ‘일상생활에서 이동에 불편을 느끼는 누구나 앉을 수 있는’ 교통약자석이 됐다. 긴 시간 동안 지하철 열차 양옆 끝에 위치한 3인석은 교통약자를 위한 좌석이란 인식이 자리 잡아 비어 있어도 앉지 않는 분위기다.

교통약자석 관련 민원은 점점 증가하는 추세다. 서울교통공사에 따르면 지난 1~8월 접수된 교통약자석 월평균 민원은 14.9건으로 지난해 월평균 민원 11.3건보다 상승했다. 코로나19로 이동이 줄었던 2020년과 2021년에는 각각 월평균 6.1건, 7.3건에 그쳤고, 2019년엔 11건으로 지난해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험한 일 겪기 싫어…“교통약자석 근처도 안 가요”

5년차 직장인 정모(29)씨는 지하철을 탈 때 교통약자석 쪽은 보지도 않는다. 지난해 자궁질환 수술 후 첫 출근길에서 교통약자석에 앉았다가 호통을 들은 일이 트라우마로 남았기 때문이다. 정씨는 “사생활 영역인 수술 여부까지 밝히고 싶지 않아 몸이 안 좋다고 말했더니 거짓말하지 말라며 한 노인에게 지팡이로 머리를 가격당했다”고 털어놨다. 정씨는 “젊다고 다 건강하냐”며 “노인만 앉는 좌석이라고 생각하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눈에 보이는 외상이라도 교통약자석 착석이 힘든 건 마찬가지다. 올해 여름 발목 수술을 한 민모(30‧은행원)씨는 “목발 짚고 깁스한 채로 교통약자석에 앉았으나 비키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고 했다. 민씨는 “여긴 노인들 앉는 곳이니 다른 데 가라는 말을 당당하게 해서 내가 교통약자석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줄 알았다”고 당시 심경을 털어놓았다.

몸이 안 좋아 교통약자석에 앉으면 괜히 눈치를 보게 된다는 반응도 있었다. 신모(30‧회사원)씨는 몇 달 전 지하철에서 갑자기 속이 메슥거리고 복통을 느껴 잠시 교통약자석에 앉았다. 이후 숨을 고르고 안정을 찾았지만, 잠시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고 한다. 그는 “그날 여기 왜 앉느냐고 말한 사람은 없었지만, 괜히 긴장을 하게 됐다”며 “교통약자석 표시를 보고 앉았어도 눈치가 보였다”고 말했다.

최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엔 ‘노약자석에 대한 엇갈리는 반응’이라는 글이 올라왔다. 2012년 한 방송국 프로그램에서 노약자석에 대한 시민들의 의견을 다룬 해당 글엔 400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다. 댓글에서 누리꾼들은 “노인석 아니다. 자리 맡겨 놨냐”, “젊은 사람은 짐도 없고 매일 팔팔하냐”, “학생 때 교통약자석 앉았다가 욕먹었는데 진짜 이해가 안 됐다”, “기꺼운 마음보단 그냥 귀찮은 일 만들기 싫어서 교통약자석에 굳이 안 앉는다”고 토로했다.

비어 있는 시내버스 교통약자석. 사진=유민지 기자

해외에선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는 좌석”

해외 다수 국가들에 교통약자석과 유사한 좌석이 존재한다. 아시아에선 일본, 중국, 대만, 태국, 싱가포르가 있고, 유럽에선 프랑스, 스웨덴 등이 있다. 영미권에서는 미국과 캐나다 등이 교통약자석을 운영 중이다. 

일본은 우선석(優先席)이라는 이름으로 임산부석 및 교통약자석을 마련했다. 일본 나고야에 사는 일본인 이하라 아이(35)씨는 “몸이 불편한 사람, 노인, 임산부, 어린이 모두 우선석에 앉을 수 있다”며 “건강한 사람도 우선석에 앉을 수 있지만, 앞서 말한 사람들이 오면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나이가 많은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문화는 없다”고 말했다.

캐나다 역시 우선 좌석(Priority Seating)이라는 이름으로 교통약자석을 운영하고 있지만, 신체 나이는 기준이 되지 않는다. 캐나다에 거주하는 박모(30)씨는 우선 좌석에 대해 “몸이 불편한 사람도, 아이와 동반한 사람도 앉을 수 있는 자리”라고 정의했다. 그는 “캐나다에도 가끔 나이를 내세우며 자리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통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교통약자석을 둘러싼 엇갈린 시각에 대해 전문가는 “당연히 나의 자리라는 특권의식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말했다. 임명호 단국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는 “노인들이 동방예의지국, 노인 공경과 배려 등을 말하실지 몰라도, 공정성을 더 우선하는 세계화 추세에서 약자가 교통약자석에 앉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정부나 사회에 의해 강제로 양보하게 된 상황이지만, 고령자 특권으로 계속 교통약자석을 이용하는 건 공정성에 위배된다”며 “수요에 따라 좀 더 유연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제도적 검토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유민지 기자 mj@kukinews.com
유민지 기자
mj@kukinews.com
유민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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