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대혁명 성공 후, 화가 다비드(Jacques- Louis David)는 프랑스 대혁명의 주축 인물인 마라(Jean-Paul Marat), 당통(Georges Jacques Danton), 로베스피에르(Maxmilien Robespierre)와 함께 혁명 정부의 미술계 일인자로 군림했다.
시대가 다비드를 만들었고 다비드가 시대를 열었다.
이 작품은 대혁명 주역 중의 한 명인 마라의 죽음을 소재로 하고 있다. 더구나 다비드는 혁명의회에 직접 참여하였고, 루이 16세의 처형에 찬성하는 투표도 했다.
같은 해, 1793년 마라의 죽음 이전에 미셀 르펠티에 암살사건이 있었다. 그는 루이 16세의 사형을 강력하게 주장한 자코뱅 당원이었고, 귀족이었지만 자신의 신분을 거부하고 가장 극렬하게 귀족을 비난해 암살 대상이 되었다. 다비드는 ‘세네카의 죽음’이래 몰두해 온 대로, 매부리 코에 튀어나온 눈으로 추남인 르펠티에를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갖춘 영웅으로 그의 작품에서 탈바꿈 시켰다.
다비드의 그림을 왕정주의자인 르펠리에의 딸이 보통 그림 값이 5,000~7,000프랑일 때 10만 프랑이라는 고가에 사서 자신의 앞날의 위해 태워버리고 동판도 파괴했다.
그해 7월 13일 마라의 암살 소식이 전해지자 다비드는 즉시 작업을 시작해 3개월 뒤 그림을 완성했다. 마라는 스위스 출신 내과 의사로서 영국에서 개업을 했으나1777년 루이 16세의 동생인 아르투아 백작(후에 샤를 10세)의 초빙을 받아 프랑스로 온 뒤 반체제 운동을 시작해 정치 이론가로 활약했다.
1789년 대혁명 후 마라는 신문 ‘민중의 벗’을 발행하며 급진적인 논조를 펼쳤다. 미진한 사회개혁에 대해 혁명정부를 비난하며, 극빈층을 위한 기본적인 개혁과 '혁명의 적'에 대한 강경한 태도를 주문했다.
마라는 격렬한 성격과 극단적 끈질김, 일관된 목소리와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민중의 신뢰를 얻었다. 그러나 그는 혁명 전 지하운동을 하면서 경찰의 수배를 피해야 했다.
그때 파리의 하수도로 도망 다니다 악성 피부병이 걸렸기 때문에 목욕물에 몸을 담근 채 약초치료를 하면서 집무를 봐야 할 정도였다.
1789년 대혁명의 불길이 타올랐다. 1793년 6월 자코뱅 당이 독재체제를 굳히자 루이 16세의 처형을 두고 온건파인 지롱드 당은 자코뱅 당과 극렬한 논쟁을 벌였고, 근소한 표 차이로 루이 16세의 처형이 결정되었다.
당시 파리 혁명광장에는 1792년 9월 2일부터 7일까지 진행된 9월 혁명의 대학살로 1,200여 명의 목이 달아나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그래서 혼란이 종식되자 혁명광장은 국민들의 화합을 기원하는 뜻에서 콩코드(화합)광장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마라를 암살한 사람은 노르망디에서 가난한 소귀족의 딸로 출생한 샤를로트 코르테(Charlotte Corday, 1768~1793)라는 여인이다. 그녀는 루소의 저서들을 읽으며 자유사상에 심취해 프랑스 혁명에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그러나 자코뱅 당의 독주로 불필요한 살육이 벌어지고 혁명의 주축인 두 정당이 결별하여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는 것을 보고 실망했다.
거기에다 가족의 신부(神父)가 공화파에 충성 맹세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에 충격을 받은 샤를로트는 프랑스 혁명의 숭고한 뜻과 목적이 더 이상 피와 살육이 난무하는 잔치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이 상황을 끝내기 위해 마라를 암살해야 한다고 스스로 결정했다.
그녀는 "10만 명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한 명의 목숨을 없앴다"고 재판정에서 항변했다. 그러나 사실 이 말은 그 전에 루이 16세를 처형하며 로베스피에르가 한 유명한 말이었다. 사람들은 시간이 흐른 뒤 샤를로트의 항변이 옳았다고 인정한다.
당국은 화가에게 감옥에 있는 그녀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허용했다.
샤를로트는 마라의 집무실에 가서 반혁명분자들의 명단을 가져왔다고 소란을 피웠고, 마라는 접견을 허락했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간 샤를로트는 명단을 읽고 있던 마라의 가슴을 칼로 정확히 찔렀고, 마라는 즉사했다.
이에 자코뱅당은 마라의 장례식에 사용할 그림을 다비드에게 주문했다. 살해되기 전날, 다비드는 병문안을 가서 마라가 팔을 욕조 밖으로 내민 채 연설문을 작성하는 걸 본 적이 있었다.
다비드는 혁명전사 마라의 살해 현장을 사실 그대로 묘사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다비드는 마라를 조국을 위해 일하다 죽은 성자의 모습으로 격상시킨 모습으로 그리기로 했다. 물론 그림에 살인자 샤를로트도 등장시키지 않았다.
볼품없이 졸지에 죽음을 당한 마라를 피에타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처럼 욕조에 비스듬히 기댄 모습으로 묘사했다. 마라의 왼손에는 "시민 마라에게, 나는 당신의 자비를 얻을 권리를 누릴 만큼 충분히 비참합니다"라고 쓰인 샤를로트가 가져온 피 묻은 가짜 청원서가 있다.
그의 엄지손가락은 ‘자비’라는 단어를 가리키고 있다. 이제 마라는 다비드의 그림으로 인해 많은 이들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 잔혹한 혁명 전사가 아니라, 머리에 하얀 두건을 쓰고 하얀 천에 싸인 순결하고 고귀한 성자로 변했다. 검은색 칼자루는 돋보이게 흰색으로 바꾸었고, 차분한 초록색 천은 흰색과 대비된다. 벽면의 갈색은 화면 전체를 숭고한 분위기로 전환시켜 마라를 영원 속으로 박제시키고 있다.
“1793년 7월 13일, 동지 마라에게, 샤를로트 코르테. 나의 불행에는 당신의 호의가 필요합니다.”
욕조 옆에 세워진 나무 상자는 마치 비석이나 관처럼 ‘마라에게, 다비드, 혁명력 2년’을 새겨 넣어 마라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들에게 자신도 함께 각인시킨다. 허름한 나무상자는 혁명의 과실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 마라의 진정성을 말해주는 소품처럼 등장한다. 나무 상자의 돈은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다섯 명의 아이와 살아야 하는 여인의 편지에 마라가 자비를 베풀어 주었음을 암시한다.
숭고한 죽음으로 포장된 마라와는 다르게 스케치로 그려진 초라한 37살의 앙투아네트 왕비는 삐죽이 자른 머리를 보인 채 가축 운반 마차를 타고 처형장으로 가고 있지만 위엄은 잃지 않은 모습이다.
다비드의 그림으로 마라는 혁명의 전사에서 역사의 희생양으로 부활했다. 로베스피에르에게 당통도 죽임을 당하고, 결국 그도 쿠데타로 반대파에 의해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세 사람의 혁명 주역들은 그렇게 서로 죽이고 죽임을 당했다. 처세술에 능했던 다비드는 다행히 단두대는 면하고 투옥되어 감옥에서 자화상을 그리는 신세가 되었다.
다비드는 로마로 망명하고 싶었지만 ‘나폴레옹 대관식’을 그렸다는 이유로 교황이 반대하니, 벨기에 브뤼셀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서 그는 1825년 12월 아들의 품에 안겨 77세의 나이에 숨을 거뒀다.
르펠리에는 딸이 있어서 그림을 태웠지만, 다행이도 마라에게는 자식이 없어서 그 그림은 불타지 않았다. 대혁명이 파고가 잠잠해진 후의 프랑스 복고 왕정 치하에서 혁명가의 그림을 원하는 사람이 없었기에 ‘마라의 죽음’은 다비드의 아들 집에 온전히 숨겨져 보관되었고, 경찰의 허가를 받은 자만이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로 인해, 여전히 감동적이며 호소력 충만한 프로파간다(Propaganda, 선전)로서의 불후의 명작 ‘마라의 죽음’을 나폴레옹이 세운 벨기에 왕립 미술관에서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