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학년도 의대 증원 정책이 중단될 가능성이 열렸다. 재판부가 의대 증원 인원을 2000명으로 정한 과학적 근거를 내놓으라고 요구하며 제동을 걸고 나섰다. 의대 증원 작업이 막바지에 이른 가운데 ‘2000명 증원’ 결정의 타당성이 막판 변수로 떠올랐다.
2일 의료계에 따르면 서울고법 행정7부(부장판사 구회근)는 지난달 30일 전공의와 수험생 등이 보건복지부와 교육부를 상대로 제기한 의대 증원 취소소송의 집행정지 항고심 심문기일에서 정부에 의대 증원 처분에 대한 근거를 오는 10일까지 제출하라고 밝혔다. 또 5월 중순까진 결론을 내겠다면서 그 전까지 의대 모집 정원 최종 승인을 보류할 것도 요청했다.
2000명 증원 결정에 대한 정부 근거가 타당했는지 면밀하게 따져보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그간 재판부는 의료계가 제기해온 증원 취소 소송 8건 중 7건에 대해 직접적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줄줄이 각하 결정을 내려왔다. 정부 정책 당사자가 의대를 보유한 대학 총장이기 때문에 교수나 전공의, 의대생은 소송을 제기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이번에는 분위기가 다르다. 항고심 재판장을 맡은 구 부장판사는 “정원이 늘면 직접 당사자인 대학 총장이 법적 다툼을 할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며 “그러면 의대 정원을 늘리는 경우 다툴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인가”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이어 “최근 판례를 보면 제3자의 원고 자격을 확대하는 경향이 있다”며 당사자 적격성을 인정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이에 따라 ‘2000명 증원’ 결정의 타당성이 법정 다툼의 핵이 될 것으로 관측된다. 정부는 그간 2035년까지 의사 수 1만명이 부족하며, 의사가 배출되는 데 6년 이상이 소요되므로, 연간 2000명의 증원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들었다. 그 근거로 보건사회연구원, 한국개발연구원(KDI), 홍윤철 서울대 의대 교수의 보고서를 언급했다.
그러나 해당 보고서에는 ‘2000명이 적정 증원 규모’라는 내용이 직접적으로 담겨있진 않다. 실제 해당 보고서를 작성한 홍 교수도 여러 차례 ‘2000명 증원이 적절한 인원이라고 밝힌 적 없다’며 해명한 바 있다. 홍 교수는 지난 3월 국회 토론회에서 “합리적인 정원 증원 규모는 500~1000명 수준이라고 정의했다”며 “정부가 해당 보고서를 적절히 인용한 것 같지 않다”고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재판부 역시 다른 근거가 필요하다고 봤다. 의료계에 따르면 정부 측은 해당 보고서를 이미 법원에 제출했지만 재판부는 근거가 불충분하다며 현장실사 조사자료, 배정위원회 회의록 등을 공개하라고 주문했다.
의대생들을 대리하는 법무법인 찬종 이병철 변호사는 2일 쿠키뉴스와의 통화에서 “3개 보고서에는 2000명을 늘려야 한다는 내용은 없다. 보고서에는 증원 규모로 각각 300명, 350명, 500명이 언급돼 있다”며 “재판부도 3개 보고서로는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보고 다른 자료를 더 요청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만약 정부가 자료를 제출하지 않을 경우 패소할 수 있다고도 전망했다. 복지부와 교육부는 ‘배정위원회 회의록’ 제출에 난색을 내비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이 변호사는 “입증 책임 원칙에 따라 교육부가 자료를 제출하지 않으면 패소할 수밖에 없다”며 “정부가 입증 자료를 내지 않았는데, 어떻게 재판부가 손을 들어주겠나”라고 주장했다.
법원이 정부의 논리를 수용해 가처분 신청을 ‘기각’하면 의대 증원 추진 정책에 동력을 얻을 것으로 관측된다. 반대로 정부의 근거가 충분치 않다고 판단해 가처분 신청을 ‘인용’한다면 의사단체의 증원 중단 요구가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의료계에서는 벌써부터 고무적인 반응이 터져 나왔다. ‘강경파’로 분류되는 임현택 대한의사협회 회장은 2일 취임식에서 “정부의 무도하고 일방적인 정책 추진에 제동을 건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부가 앵무새처럼 주장하고 있는 2000명 증원의 근거는 이미 연구 당사자들에 의해 아전인수격으로 해석됐음이 만천하에 밝혀졌다”며 “무엇보다 최근 국립 의대들의 정원을 자율적으로 조정토록 한 것은 2000명이라는 숫자가 아무런 근거조차 없음을 정부가 스스로 자인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전국의과대학 교수협의회도 1일 “법원의 결정을 환영한다”며 “정부의 일방적인 의대 정원 증원 정책이 적법하고 근거 있는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는 의료계 의견을 받아들인 것이다”면서 “한국대학교육협의회(대교협)의 입학 정원 승인절차는 중지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교육부와 대교협은 전국 의대가 제출한 ‘2025학년도 대학입학전형 시행계획’상 의대 모집 인원을 취합해 2일 공개했다. 내년 의대 증원 규모는 최소 1489명에서 최대 1509명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의대 증원 규모에 대해 법정에서 다투고 있는 상황에서 교육부가 내년도 의대 모집 인원을 발표한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병철 변호사는 “재판부가 증원 절차를 보류하라고 했는데, 마치 최종 확정이 났다는 듯 발표했다”며 “교육부 측은 대교협 대입전형 기본사항에 따라 통계를 발표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확인해보니 그런 규정은 없다. 재판부를 우롱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김은빈 기자 eunbeen1123@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