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 (49)

[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 (49)

고독한 가족의 긴장을 묘사한 <벨렐리 가족> 

기사승인 2024-08-05 09:57:31
에드가 드가, 예술가의 초상, 1854~1855, 종이를 접착시킨 캔버스에 유채, 81x64cm, 오르세 미술관

드가(Edgar Degas, 1834~1917)는 인상주의 운동의 창시자 중 한 사람으로 19세기 후반의 저명한 예술가였다.

드가는 부르주아 귀족 가문의 금수저로 예술과 학문을 직업이 아닌 취미로 즐기는 약간 부정적인 의미의 딜레탕트(Dilettante)였다. 드가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40살까지 취미로 예술을 하며 돈을 벌 필요가 없었다.  

20살 경의 자화상인 이 작품은 ‘나는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라는 자부심과 '나는 나의 길을 가련다'라 말하는 듯 굳이 ‘예술가의 초상’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드가가 그린 약 15점의 자화상 중 가장 야심차고 성공적인 작품이다.

20대 초반의 가녀린 얼굴선이 섬세하고 까탈스러운 성격임을 말해준다. 이 자화상으로 우리는 드가가 예민하지만 단정하고 고집스러운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꽉 다문 입에 캔버스는 보이지 않지만 오른손에 데생용 흑연을 잡고 있어 화가라는 걸 말해준다. 이런 구도는 플랑드르의 카타리나 반 헤메센(Catharina van Hemessen)이 20살인, 1548년에 그린 자화상에서 유래한다.

그녀는 1528년에서 1565년까지 활동하던 기록과 작품이 남아있는 최초의 여성 화가였다. 벨기에 브뤼셀 왕립 미술관에 있는 그 자화상은 캔버스 앞에서 붓을 들고 있는 화가로서의 자신을 묘사했다. 이 구도는 수백 년 동안 자화상의 텍스트가 되었다. 

에드가 드가, 일레르 드가, 1857, 캔버스에 유채, 오르세 미술관

드가의 조부 일레르(Hilaire Degas)는 그의 약혼녀가 1792년 혁명군에 의해 단두대에서 최후를 맞자 혁명의 돌풍을 피해 파리를 탈출하여 이집트에서 나폴레옹 군대에 입대하였다.

이후 나폴리에 정착하여 은행을 설립하였고 사업은 승승장구하여 나폴리의 왕이며, 나폴레옹 처남인 조아셍 뭐라(Joachim Murat)의 자산관리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방이 100개인 궁전을 구입할 정도의 부를 쌓았다. 드가의 아버지 오귀스트는 나폴리 은행 파리 지점장이 되어 파리에 정착하였고, 이후 미국 남부에서 성공한 면직물 상인의 딸인 셀레스틴 뮈송(Celestin Musson)과 결혼하였다. 

이탈리아에 머물던 손자 드가는 할아버지의 초상화를 그렸다. 87 세에 노인은 가족의 궁전에서 지팡이를 무릎 위에 올리고 소파에 앉아 있는 권위적인 가장으로 묘사된다. 자수성가하여 자부심이 넘치는 백발의 노신사는 혈색도 매우 좋다. 또렷한 안광과 꽉 다문 입매가 여전히 일과 가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초상화는 마네의 가족 초상화와 함께 전시되어 있었는데, 마네가 부모님의 초상화를 그릴 당시 아버지 오귀스트는 매독으로 매우 위중한 상태였다. 조부 일레르의 맑은 피부를 보면 매우 강건해 보인다. 군인으로 지내며 고난을 겪었던 젊은 시절을 잊지 않고 평생 경계하는 삶을 살아왔음이 엿보인다.

드가가 존경하던 앵그르를 연상시키는 고전적인 화풍과 구도이다.

에드가 드가, 중세 전쟁 장면(오를레앙 시의 불행이라고 잘못 알려진), 1865년경, 85x147cm, 캔버스에 덧붙인 종이 위에 기름, 오르세 미술관

드가는 중세의 전투 장면을 그린 이 작품으로1865년 살롱에 데뷔했다. 이 그림은 살롱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고 눈에 띄지도 않았다.

드가는 습작용 데생을 나열한 듯한 어색한 누드와 고대와 르네상스 화가들의 고전 화법으로부터 물려받은 기수와 말을 자유롭게 결합했다. 중간 색조와 구도는 후일 롱샹 경마장에서 그린 작품의 탄생을 예고한다. 이후 그의 주제는 역사화에서 더 현대적인 주제로 천천히 바뀌게 되었다. 

드가는 1853년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로스쿨에 진학하기를 원했던 아버지의 바램에 부응하여 파리 대학교에서 법학 학위를 취득하려 했지만, 법률가가 될 생각이 없어서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18살엔 집에 스튜디오를 꾸미고, 1853년까지 루브르에 필사자로 등록한 드가는 2년 만에 아버지를 설득하여 법대를 그만두었다.  

이후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하여 신고전주의 대가 앵그르의 제자인 루이 라모트(Louis Lamothe)를 스승으로 모셨다. 그래서 드가는 앵그르를 두 번 만날 수 있었다. 앵그르는 “선을 그리시오, 젊은이. 실물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 기억을 더듬어 더 많은 선을 그리시오. 그러면 훌륭한 예술가가 되어 있을 거요.”라 조언했다.

앵그르의 엄격하고, 원칙적이며 이상을 추구하는 예술관이 드가와 잘 맞았다. 그래서 드가는 평생 색보다는 선을 중시하는 예술가가 되었다.  

드가는 이탈리아로 가서 위대한 거장들의 예술 작품을 공부했다. 그곳에서 3년 간 수십 권의 스케치북에 700 점이 넘는 인물 위주의 작품을 묘사했다.

에드가 드가, 벨렐리 가족, 가족 초상화, 1858~1869, 캔버스에 오일, 201x249.5cm, 오르세 미술관

22세에서 26세까지 드가는 친척이 살고 있던 이탈리아에서 화가로서의 훈련을 마쳤다. 여기서 그는 고모(Laure)의 가족 초상화를 그린다. 고모부 벨렐리 젠나로(Baron Bellelli), 고종사촌 동생 기울라(Giula)와 지오바나(Giovanna)이다. 1860년, 두 어린 사촌 기울라와 지오바나는 10살과 7살이었다. 

고모부는 나폴리에서 추방된 남작으로 피렌체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안락의자에 왼팔을 올리고 앉아 옆모습으로 묘사된다. 정략결혼으로 두 딸이 태어나고 10년이 흘렀다. 평생 직업을 갖지 못해 경제력이 없는 남편과의 불화는 메울 수 없을 만큼 골이 깊었다.  

그는 부인과 두 딸로부터 소외되어 존재감이 거의 없다. 서로 엇갈린 자세와 시선처리는 가족이라는 정서적인 울타리를 완벽히 차단한다. 고모는 큰 딸을 앞에 세우고 어깨에 손을 올렸으며, 작은 딸에게 왼손을 뻗어 두 딸에 대한 유대와 영향력을 보여준다.  

얼마 전 사망한 아버지를 애도하려 고모는 검은 상복을 입었다. 고모의 얼굴 바로 옆 액자에 아버지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고모의 냉랭한 표정에서 드가의 냉소와 시니컬함이 이 집안의 내력임을 보여준다.

지오바나(Giovanna)
 
스커트 아래로 한쪽 다리를 꼬고 있는 개구쟁이 같은 작은 딸의 자세만이 무거운 정적을 깨트리고 있다. 

경직된 언니 기울라(Giula)

위엄이 있는 어머니는 다소 엄격한 권위를 주장하는데, 이는 아버지의 위축된 자세와 상대적으로 큰 대조를 보인다. 이 가족의 집단 초상화는 플랑드르 거장, 특히 반 다이크(van Dyck)의 작품을 연상시킨다.

젊은 시절 드가의 걸작인 이 초상화는 각 등장인물을 고독하게 만들어 가족 내의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기울라(Giula)

인상적인 형식, 차분한 색상, 문처럼 구조화된 개방형 관점 등 모든 것이 불안하고 긴장된 분위기를 강화하는 데 기여한다. 특히 오른쪽 하단에서 화면 밖을 향하는 작은 개는 반신만 보인다. 이는 팽팽히 당겨진 활시위처럼 숨막히는 정적에서 탈출하고 싶은 암시이기에 더욱 그렇다.  

드가는 일찍이 20 살의 초상화에서 보인 이미지 그대로 일관된 삶을 영위했고, 습작기에 만난 앵그르의 말을 평생 실천했다. 드가는 자신이 묘사하는 대상과 객관적인 거리감을 유지했기에 어린 발레리나, 목욕하는 여인, 달리는 경주마들일지라도 온기와 생동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드가는 자신의 생각을 그림에 냉철히 표현했다. 보들레르의 <현대 생활의 화가>에 동조하여 르느아르와 함께 비정치적이고 세련된 파리지앵의 감수성을 잡아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근대적인 도시의 그늘진 모습도 부드러운 색과 조형으로 고정시켜 인기있는 화가였다.  

다양한 소재의 글로 자유로운 <드가, 춤, 데생, 1936>을 펴낸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 폴 발레리는 여전히 더 사교적이지 않고, 더 단호하고, 더 견디기 힘든 드가를 다시 만난 후, 몇 년 동안 그를 보지 못했다. 1917년 일차대전 중 드가의 부고를 듣고 이렇게 회고했다.

“그는 오래 살다 죽었다. 시력을 잃은 후에 죽었기 때문이다. 작업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가 살아갈 이유가 없었다. 그가 만든 마지막 작품은 텁수룩한 짧은 턱수염을 기르고, 모자를 쓴 그의 자화상이었다. 그는 그것을 보여주며 ‘개를 닮았지’라 말했다.” 

다들 삶의 희노애락을 자기 시대의 전유물로 생각하지만 사람이 사는 모습은 어느 시대나 똑같다. 혐오스러운 것이든 충동적인 것이든 인간의 모든 충동과 욕망은 똑같다.

내 주변에 현재와 나 자신을 알고 싶다면 과거를 먼저 알아야 한다. 미술사는 그저 한 시대를 풍미한 화가의 과거사를 배우는 게 아니고 보다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현재의 답을 찾는 공부다.

◇최금희 작가
최금희는 미술에 대한 열정과 지적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 수차례 박물관대학을 수료하고, 서울대 고전인문학부 김현 교수에게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예술의 전당 미술 아카데미에서는 이현 선생에게서 르네상스 미술에 대하여, 대안연구공동체에서 노성두 미술사학자로부터 서양미술사를, 그리고 미셀 푸코를 전공한 철학박사 허경 선생에게서 1900년대 이후의 미술사를 사사했다. 그동안 전 세계 미술관과 박물관을 답사하며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직접 촬영한 사진을 통해 작가별로 그의 이력과 미술 사조, 동료 화가들, 그들의 사랑 등 숨겨진 이야기, 그리고 관련된 소설과 영화, 역사 건축을 바탕으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현재 서울시 50플러스센터 등에서 서양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쿠키뉴스=홍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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