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전증은 사회적 선입견과 오해가 얽힌 질환이다. 환자는 자신의 병을 당당하게 밝히지 못하며, 약제비는 물론 잦은 입원 치료로 인해 경제적 부담도 크다. 이들이 편견에 갇히지 않고, 함께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인식 개선과 정책적 지원이 이어져야 한다는 제언이 나온다.
한국뇌전증협회는 9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협회 설립 50주년 기념식을 개최했다. 협회는 지난 1974년 설립 이후 뇌전증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또 환자들의 안전한 생활을 위한 인식 개선 사업과 함께 저소득층 의료비 지원 등 다양한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뇌전증은 뇌신경세포에 과도한 전류가 흘러 반복적으로 신체 경련 발작이 발생하는 뇌질환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022년 기준 뇌전증 환자 수는 15만747명으로 2020년부터 매년 평균 2093명씩 증가하고 있다. 이는 심평원에 등록된 환자 수로, 대한뇌전증학회는 실제 환자가 약 37만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뇌전증 환자의 20~30%가량은 두 가지 이상의 약물 치료를 받는데 경련 발작 증상 때문에 일상생활 속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뇌전증으로 인한 근육 경직 과정에서 근육이 융해되기도 하고, 호흡 곤란으로 저산소증이 생기는 등 신체 손상률이 일반인 대비 최대 100배 높다. 특히 뇌전증은 여러 정신건강 문제를 수반한다. 환자의 50%가 우울증, 40%는 불안증을 겪는다. 학업, 취업, 결혼 등에서 질병으로 인한 좌절을 경험하고 심리적으로 위축되기 쉽다. 실업, 차별을 겪기도 한다.
뇌전증은 과거 ‘간질’로 불렸지만 사회적 편견과 오해가 이어져 2009년 병명이 변경됐다. 뇌전증이 발병하면 전신이 뻣뻣해지고 팔다리가 떨리며 입에서 침과 거품이 나온다. 이런 모습은 과거 ‘악마에 씐 모습’으로 여겨졌고, 뇌전증 환자는 기피 대상이 됐다. 실제 뇌전증 환자 대부분은 발작이 일어나는 순간 외에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정상적인 생활을 한다. 환자 중 70%는 발작을 억제하는 항경련 약물을 통해 조절할 수 있으며, 증상을 유발하는 뇌 병변을 제거하는 수술로도 치료가 가능하다.
김흥동 한국뇌전증협회장은 “뇌전증은 진단받는 순간부터 오랜 기간 치료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고 사회적 편견과 맞서 싸워야 한다”며 “긴 시간 동안 정부의 관심에서 철저히 외면당한 뇌전증은 21세기 선진 대한민국에서 떳떳하게 밝히지 못하는 유일한 질환으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뇌전증으로 고통받고 있는 37만명의 환우들은 여전히 뇌전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부끄러워한다. 직장에서 발작이 발생하면 해고를 당하고, 능력과 관계없이 취업에서 탈락하고, 배우자를 만나거나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다. 뇌전증 아이들은 유치원이나 보육시설에서 외면 받고 있다”면서 “협회 임직원들과 힘을 모아 환자들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끝까지 함께하겠다”고 강조했다.
여야 정치권도 뇌전증 환자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다.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1대 국회 때 뇌전증 지원법을 내놓았지만 관철시키기 위한 노력이 부족했던 것 같다”라며 “여야가 노력해서 이번엔 법안이 통과돼야 한다. 협회의 지난 50년간의 역사를 반영해 (뇌전증 지원이) 제도화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남 의원은 지난 2020년 뇌전증의 예방·진료·연구 및 환자 지원, 차별 방지 방안 등을 담은 ‘뇌전증 관리 및 뇌전증 환자 지원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한 바 있다. 인요한 국민의힘 의원은 “이 분야에선 여야가 없다”며 “우리 여당에서 힘을 150% 실어 드리겠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