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가 ‘사도광산 강제징용자 추도식’에 야스쿠니 신사 참배 이력이 있는 인사를 대표로 보내면서, 한일 정부가 합의했던 첫 추도식이 파행을 맞았다. 추도식은 일본 정부가 지난 7월 사도광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할 때 한국의 동의를 얻기 위해 약속한 조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민감한 과거사 문제에서 매번 한 발짝 양보하며, 일본 정부의 선의에 기대 온 윤석열 정부의 대일(對日) 외교가 한계를 드러냈다는 비판이 나온다.
한국 정부는 25일 오전 일본 니가타현 사도섬 사도광산 인근 조선인 기숙사였던 ‘제 4상애료’ 터에서 별도로 일제강점기 강제노역했던 조선인들을 기리는 추도 행사를 열었다.
사도광산은 에도시대(1603∼1867)에 금광으로 유명했던 곳으로, 태평양전쟁이 본격화한 이후 전쟁 물자를 확보하는 광산으로 쓰였다. 당시 1500여명으로 추산되는 조선인들이 강제 동원돼 혹독한 환경 속에서 차별받으며 일했다.
이날 추도식에는 한국 유족 9명과 박철희 주일 한국대사가 참석했다. 행사는 강제 노역한 조선인을 추모하는 추도사와 낭독, 묵념과 헌화 순서로 진행됐다.
당초 한국 유족과 정부 대표는 전날(24일) 일본 주최로 사도섬 아이카와개발종합센터에서 개최된 ‘사도광산 추도식’에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행사 전날인 23일 불참을 일본에 통보했다.
일본은 지난 7월 일제강점기 사도광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면서 한국 동의를 얻기 위한 조건으로 매년 현지에서 추도식을 열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4개월 간의 협의기간 내내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추도식에 참석하기로 한 일본 측 인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이력이 결정적 문제가 됐다. 일본 정부 대표로 추도사를 낭독하기로 한 이쿠이나 아키코 외무성 정무관은 태평양 전쟁 A급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한 우익 성향 인사다. 또한 일본은 ‘조선인 강제징용’ 등의 표현을 추도사에 포함하라는 정부의 요청을 수용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실제 추도사에서도 일본 측은 조선인 노역의 강제성을 인정하는 표현을 누락했다. 이쿠이나 아키코 외무성 정무관은 추도사에서 한반도 노동자에 대해 “전쟁이라는 특수한 사회 상황 하에서라고 해도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땅에서 사랑하는 가족을 생각하면서 갱내의 위험하고 가혹한 환경에서 곤란한 노동에 종사했다”며 “종전(終戰)까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유감스럽지만, 이 땅에서 돌아가신 분들도 있다”고 말했다. 조선인 노동자가 강제 동원돼 차별받은 사실은 물론이고 사죄나 유감의 표현도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야스쿠니 참배 이력을 가진 인사 파견과 사과 없는 추도 내용, 추도식 불참 등으로 첫 행사가 반쪽짜리 행사로 전락하면서, 한국 정부는 외교 실패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일각에서는 훈풍이 불었던 한일관계가 경색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더불어민주당은 “굴욕적 대일 외교”라며 정부의 대응을 맹비난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이날 국회 최고위원회의에서 강제노역 사과 없이 진행된 일본의 사도광산 추도식 논란에 “정부의 처참한 외교로 사도광산 추도식이 강제동원 피해 노동자 추모가 아니라 일본의 유네스코 등재 축하 행사로 전락했다”며 “해방 이후 최악의 외교 참사”라고 비판했다.
이 대표는 “그동안 참 많이 퍼줬다. 독도도, 역사도, 위안부도, 강제동원도, 군사협력도 퍼줬다”며 “이런 저자세, 퍼주기 외교의 결과가 바로 이 사도광산 추도식 참사”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일본 정부의 계속되는 역사 왜곡과 그에 부화뇌동하는 한국정부의 굴욕외교,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미래지향적이고 정상적인 한일 관계는 있기 어렵다는 말씀을 드린다”고 우려했다.
여당에서조차 “외교 당국의 안일한 태도 때문은 아니었는지 겸허한 반성과 점검이 필요하다”는 비판이 나왔다.
추경호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이날 오전 최고위원회의에서 “이번 사도광산 추도식은 한일 양국의 민감한 현안인데도 우리 정부의 요구 사항이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 걸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라며 “이 같은 결과가 우리 외교 당국의 안일한 태도 때문은 아니었는지 겸허한 반성과 점검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 정부는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모처럼 조성된 한일 우호 분위기를 흔들어서는 안 될 것”이라며 “사도광산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진정어린 추모를 포함해 과거 식민통치 역사에 대한 분명한 속죄와 반성은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를 위한 기본 전제”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