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본회의 상정을 앞뒀던 반도체특별법이 여야 간 이견으로 무산됐다. 국민의힘은 반도체 연구개발(R&D) 근로자의 주 52시간 근무시간 상한 예외를 골자로 한 해당 법안 처리를 강력히 촉구했지만 더불어민주당은 기존 법안을 활용해야 한다며 반대하고 있다. 다만 최근 중도외연 확장에 주력해온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해당 법안을 두고 고심 중인 기류가 포착되면서 민주당 내 입장 변화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29일 정치권에 따르면 국민의힘은 글로벌 반도체 경쟁이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한국의 경쟁력 유지를 위해 반도체 특별법 처리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 역시 28일 삼성전자 평택공장에서 개최한 ‘한국 반도체 다시 날자’라는 주제로 열린 반도체협회 초청 간담회에서 “반도체 사업은 국가 전략 사업으로,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며 “원포인트로 제도를 개선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해당 법안을 살펴보면, 신기술 개발에 종사하는 연구개발자는 근로시간과 휴게시간, 연장·야간·휴일 근로에 대한 규정을 서면 합의로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여당은 이러한 조항이 강제성이 아닌 임의 조항이라는 점을 들어 민주당도 수용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민주당은 현행 근로기준법 내 유연근로제 등을 통해 주 52시간 초과 근무가 가능하다는 점을 들어 특별법 제정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강유정 원내대변인은 지난 14일 정책조정회의 직후 “반도체특별법에서 노동시간 특례 조항을 제외하고 현행 근로기준법 내 유연근로제도를 활용하면 된다”며 특별법 제정 대신 사회적 합의를 통한 근로기준법 개정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밝혔다. 현재 재량근로제, 선택근로제, 탄력근로제 등을 통해 이미 주 52시간 초과 근무가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며, 추가적인 법 개정은 불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재량근로제는 업무 특성상 근로자 대표와 사용자가 서면 합의할 경우 근로시간 제한이 사실상 없는 상황이다. 탄력근로제를 통해서도 근로자 대표와 합의 시 최대 주 64시간까지 연장 근무가 가능하다. 특별연장근로제는 고용노동부 장관의 승인을 받으면 주 60시간을 넘길 수 있다. 이같은 이유로 민주당은 현행법 내 제도를 활용해도 충분히 연구개발 효율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민주당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한 관계자는 28일 쿠키뉴스와 통화에서 “기존에 있는 제도를 충분히 쓰면 얼마든지 노동시간을 유연하게 할 수 있는 요건들이 많다. 또 연구개발 업무에 반도체만 있는 것도 아닌데 반도체만 담아서 특별법으로 하자는 것은 법을 다루는 측면에서도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다만 이 대표는 반도체특별법에 대해 다소 유연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 대표는 지난 11일 한국경영자총협회를 방문해 “일률적으로 정해진 노동시간 제한이 연구개발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노동자에게도 불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지난 4일 최태원 SK그룹 회장과의 만남에서도 “반도체와 AI등 핵심 산업에 대한 지원 방안을 신속히 추진하겠다”고 강조한 바 있다. 민주당 핵심 관계자는 27일 “이 대표가 여러 가지 법안들 중 반도체특별법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 대표의 이같은 발언들은 중도층과 재계를 겨냥한 우클릭 행보로 평가된다. 그가 노동정책에서도 유연성을 강조하며 재계와 협력 가능성을 열어둔 만큼 반도체특별법 역시 수용 가능성이 당내에서 거론된 셈.
한편 노동계는 이 법안이 근로기준법의 규율 체계를 무시하고, 노동자의 생명·안전·건강권을 침해할 수 있다며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민주당 내 강경파 역시 이러한 우려를 공유하며 법안 수용에 신중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어, 향후 이 대표가 반도체특별법을 수용하게 된다면 노동계와 당내 강경파를 어떻게 설득할지가 관건이다.